비행운으로 가득한 하늘

해변 앞 편의점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열린 문 사이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고 간다. 그 틈을 비집고 맥주 두 캔과 감자칩 한 봉지를 집어든다. 썬크림과 태닝오일 판매대 앞에 선다. 코코넛을 좋아한단 이유로 코코넛이 그려진 오일로 고른다. 냄새만 맡아도 바다와 이글이글한 태양이 그려진다. 후각적 심상의 표본이 된다. 시원한 맥주캔을 들고 바닷가로 향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훌러덩 옷을 벗어던지고 몸을 굽고 있다. 충분히 그럴 만한 볕이다. 

질서 없음의 질서. 한낮의 바닷가에서 누군 누워서 몸을 태우고 누구는 수영을 하고 어떤 이들은 모래밭 위에서 배구공을 튕긴다. 내가 챙 넓은 모자에 얼굴을 숨기는 사이, 달은 태닝할 준비를 마친다. 출발, 요이땅. 나는 달의 등판에 새로 산 오일을 발라준다. 술김에 몹시 너그러워진 탓이다. 떠나기 며칠 전 들린 교보에서 책 한 권을 샀다. 건축가가 쓴 도시 이야기다. 서서 목차와 내용을 훑어보는데 마음에 담아둘 내용이 많았다. 나는 이 책을 나보다 더 마음에 들어할 사람을 떠올렸다. 사들고 온 책 겉면을 에이포로 감쌌다. 선물하기 전 표지에 손때가 탈까 걱정하는 마음에. 우리는 오늘 저녁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 선물하기 전 열심히 책을 들여다보는 달.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다. 페퍼론치노가 들어간 오일 파스타를 시켰는데, 별 맛이 없었다. 어떻게 이탈리안이 맛이 없을 수가 있지, 사소한 실망. 그보다 안주로 시킨 올리브 절임이 훨씬 맛있어서, 나는 생맥주 한 잔을 손쉽게 비운다. 짭짤한 입을 맥주로 헹군 후 다시 슬금슬금 산책.

편하게 신을 쪼리를 하나 살까 싶어 스포츠 용품 매장을 둘러본다. 여간해서 맞는 사이즈를 찾기 힘들다. 디자인과 사이즈 그리고 가격까지 고려해봤을 때, 오늘은 이만 철수하기로 한다. 나중에야 알게 된다. 새 신발을 사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었다는 것을. 바닷가의 하늘은 몹시 높고 푸르다. 비행기가 남긴 구름이 하늘에 선을 긋는다. 비행운. 아름다운 낭만 이전에 어쩔 수 없이 소설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낭만 없는 아름다움. 담담함이 자아내는 슬픔들.

집에 돌아와 세탁기에 돌린 빨래를 널어두고 잠시 숨도 돌린다. 가려고 하는 레스토랑이 예약을 따로 받지 않는다고 하여, 우리는 조금 일찍 집을 나서기로 한다. 에이포를 벗긴 책을 챙긴다. 펜을 꺼내 앞 장에 짧은 메모도 쓴다. 프린트가 화려한 원피스로 갈아입고서 나설 준비를 한다. 기대할만한 저녁이다.



우리가 살아남는 법

맛난 과일과 맥주의 힘을 빌어 낮잠을 잤다. 낮잠은 낮잠인데, 깨고 보니 열한 시다. 밤 열한 시. 손쉽게 반나절이 사라졌다. 거실 소파에 누운 달을 깨워 밤마실이라도 나가보려 했으나, 도통 일어나질 못한다. 이젠 인정해야 할 때가 왔는가. 내 몸이 내 마음 같지 않다는 사실을.     자는 달을 두고 노트북을 켰다.... » 내용보기

한 줌의 보리와 홉

간밤 편의점에서 사들고 온 것은 물, 여섯 개 들이 맥주가 다였다. 장을 볼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것 또는 여비의 절약 이전에 기쁨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가벼운 주머니로도 살 수 있는 행복. 집 가까운 곳에 커다란 시장Mercat del Nino이 있기에 그곳으로 향했다. 시장 건너편에는 거리 이름을 딴 작은 식당이 있었는데, 지날 때마... » 내용보기

보통날의 아침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바르셀로나에서 맞는 아침. 부엌 앞 너른 창밖으론 제비들이 난다. 날은 약간 흐리고 공기도 선선하다. 긴팔 옷을 꿰어입고 집을 나선다. 우리도 제비처럼 배를 채우고 장도 좀 봐서 와야겠다 싶었다. 이른바 동네 탐색의 시간. 정방형의 블럭들이 모인 도시. 그 사잇길을 따라 몇 번 맴을 돈다. 달은 이내 집 근처의 지도를 파악한... » 내용보기

여권 지갑 속 조그만 부적

인천-뮌헨-바르셀로나로 가는 여정. 좌석에 앉아 자일리톨 껌을 꺼냈다. 비닐을 벗기고 껌 하나를 꺼내려는데 종이 포장지의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매사 순조롭게 풀리게 되리라'. 껌종이에 쓰인 글귀치곤 엄중한 어조다. 문득 이 예언적 글귀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순리대로 순조롭게 별 탈 없이. 그런 여행이 된다면 얼마나 ... »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