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지난 주 이 시간엔 제주에 있었다. 개운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가방을 꾸리며. 떠나기 전의 서먹함은 많이 녹아내린 상태였다. 별 계획 없이 제주로 왔고,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별 계획 없이 왔으니, 늘 가던 곳만 가게 된다. 제주의 서쪽 해안, 남쪽 해안 그 어귀를 뱅뱅 돌았다. 연말 전 주중, 아마도 비수기였나 보다. 어디를 가도 사람이 없어, 그 자체가 쉼이 되었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릴 때만 해도 우리 사이엔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서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멍하니 티비나 보았다. 낚싯배가 전복된 뉴스가 속보로 나오고 있었다. 그냥 너 혼자 가라고 하고 나는 집에 갈까 그런 생각을 했다. 달도 그리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깊이 감추고선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윽고 밤의 제주.

시작은 고기와 맥주였다. 지글대는 불판 앞에서 우리는 고기를 먹었다. 해안가의 펍을 찾아 맥주도 마셨다. 맥주는 묵직하면서도 달았다. 그 김에 속마음을 조금 털어놓았던가. 아직은 다 알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창 밖에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 사람들이 종종거리며 출근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우리는 늦은 아침을 먹고, 시장에 들렀다. 어른들께 보내는 택배를 부치고서, 우리 몫으로 간식도 사들고 나왔다. 떡과 귤은 여행 내내 요긴한 벗이 되어주었다. 체크인 시간보다 이르지만 우선 가보자고 들린 호텔에서 운 좋게 업그레이드를 받았다. 둘이 쓰기엔 너른 스위트룸. 날씨는 사나워보였지만, 다시 방을 나섰다. 인적 드문 갤러리에서, 역시 말 없이 앉아 이십오 분 짜리 다큐를 보았다. 알뜰히 꾸려놓은 전시들을 보고, 아기자기한 마당도 거닐었다. 그러면 다음은 어디를 갈 것인가, 우리는 오름으로 향했다.
그 옛날의 여름 함께 올랐던 곳이다. 옅은 비와 거센 바람이 몰아치던 때, 우리의 우산은 뒤집어지고 결국 걷는 것인지 미끄러지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내려왔던 곳. 능선 사잇길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바람이 몰아쳤다. 서편 하늘로 해가 지고 있었다. 위기 상황에서 사용자보다 먼저 조난된다는 아이폰. 전원이 꺼지기 전 몇 장의 사진을 담았다. 빨개진 얼굴로 서로를 부여잡고 웃는 우리.
다음 날은 중산간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길목에 선 경찰들을 보았다. 산으로 향하는 도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체인을 단 대형 차량만 진입할 수 있다고. 신기하게도 하늘의 절반에서 눈이 날리고 있었다. 산할아버지 구름 모자 쓴 것 처럼. 눈은 비처럼 되었다가, 우박이 되었다가, 또 모두 사라졌다가를 반복했다. 우리가 숲에 들어설 때만 해도 하늘은 잠잠해졌다. 그러나 좁은 숲길을 걷는 사이 다시 그 모두를 보았다. 시린 손을 참고 오목하게 모아 내밀면, 손바닥 위로 우박들이 쏟아졌다. 그것을 몇 개 먹어보았다. 샤벳같은 질감이었다. 그렇게 숲길을 걷는다. 길이 좁고 미끄러워 우리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걷는다. 아무런 말 없이. 날씨가 사나워 마주치는 이들도 몇 없었다. 거대한 숲 속을 걷는 우리 둘. 나무들의 생김과 이름은 모르지만, 바닥에 깔린 낙엽들의 모양이 다채로운 것은 알았다. 길 따라 깔린 카펫같은 잎들을 밟으며 계속 걸었다.
제주도에서 만들었다는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았다. 호사스러운 밤이었다. 욕조에 가득 물을 받고 족욕만 했으니 더 그렇기도 했다.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고, 말 없이 한참을 걷고, 좋은 공기를 마시는 날들. 길가에 서면 시야의 왼쪽 끝부터 오른쪽 끝까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내가 초식동물이 아님에도 그랬다. 해풍을 이겨낼만큼 뜨끈한 볕. 껴입은 가디건과 목도리마저 벗어들고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새로 피어난 들꽃들이 있다. 개천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오리들이 헤엄을 친다. 백로도 여럿 보았다. 차로 달리다 그냥 좋을 것 같아 멈춘 곳들에서 정말 좋은 것들을 보았다. 성산의 성당 마당에선 믿을 수 없는 풍경들이 펼쳐졌다. 종교를 고려해 볼만큼 아름다운 정원.
공교롭게도 시작과 끝이 같았다. 공항 가기 전 마지막으로 툭 털어넣은 맥주. 술의 이름은 막차, 도수가 팔 프로였던가. 맥주임에도 가슴팍이 찌르르 데워지는 것을 느꼈다. 한 모금 맛만 본 너도 그러했으려나. 우리는 한결 순해진 얼굴로 서울로 돌아왔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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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계절

그제는 놀라운 일이 있었다. 대문을 여니, 문간에 하얀 밥그릇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한때는 우리의 밥그릇이었다가 이제는 고양이 밥을 담아주는 그릇. 바람이 분다고해서 마당에 있던 그릇이 예까지 날아오기란 쉽지 않은데. 문이 열리는 딱 고 지점에 놓여있다. 설마 밥 달라고 물어다놓은 것일까, 하고 혼자 웃다가 그릇을 들고 마당에 가보니 농담처럼 고양이가 ... »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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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서울역으로 향한다. 일주일 전 방콕에서 온 나타폴을 데리러 간 길이기도 하다. 그 후에 부산 여행을 마치고 온 키아를 마중간 길이기도 하고. 밤이 이슥하기에 서부역 출구 앞에 잠깐 차를 댄다. 기차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만든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나타폴을 데리러 갔을 때 알게 된 것이기도 하다. 낮과 달리, 자정 즈음... »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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