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니

이제는 수업 후가 아니라 퇴근 후에 모인다. 두당 반 마리의 닭과, 얼마간의 맥주를 맛있게 잡순다. 서글픈 아이스크림을 달랑달랑 들고서 학교로 오른다. 여기 우리 가도 되나, 하고 잠깐 쭈뼛쭈뼛 머쓱해하다가 은근슬쩍 주저앉는다. 방실방실 귀여운 새내기들이 신나게 서빙을 한다. 새내기들 앞에서 우리 학번 이야기하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감추기 어려워한다. 그렇겠지. 쟤네들 눈에 04학번이라면, 뭐 걸어다니는 암모나이트나 삼엽충처럼 보이지 않겠어? 이내 놀람을 가라앉힌 새내기들은 열심히 맥주도 날라오고, 안주도 더 집어준다. 우리도 그랬지, 쏘야 만들고 뻥튀기 집어먹고 그치, 몰래몰래 술 꺼내 마시다 총무 울고 그랬는데, 그랬는데, 그랬는데의 물결. 그게 팔년 전이다. 그새 야금야금 나이 먹은 우리는 호주에서 겪었던 흐린 결말의 로맨스도 듣고 새로 취직한 회사에 출퇴근할 방법도 고민해본다. 독일행 계획에 박수를 치고, 못 다한 안부들을 전해 전해 듣는다. 나는 학교 전경을 찍어보겠다고 인파를 헤치고 스탠드에 기어올라간다. 어둠을 밝히는 천막들이 연등행렬 같다. 난간을 잡고 조심히 내려오려는데, 어느 앳된 아기가 '남자친구 있어?'라고 반말을 한다. 삼엽충 입가에 피식 미소가 번진다. 대답 없이 내려가는데 그 친구가 말하길, '되게 도도한 척 하네' 하아.. 귀엽게 무엄하다. 돌아와서는 얘들아, 어느 아기가 옹알옹알대더라, 하고 말해주었다. 믿지 않던 딩은 화장실 한번 다녀오더니, 야! 정말이구나! 진짜 애기들이 옹알옹알 번호 물어본다고 한다. 음악과 술이 넘실넘실대는 축제의 밤, 학교의 곳곳은 달큰하고 몽롱하다. 어이고 좋을 때구나, 말이 절로 나온다. 나는 보기 좋은 관망자가 된다. 축제의 판을 벌리는 대신에, 축수하는 노인의 마음이 된다. 오월은 깊고 술은 달다.

오월

이천십년 오월 이천십일년 오월 이천십이년 오월 » 내용보기

일상의 바다

마음이 바쁘기도 했고, 몸이 바쁘기도 했다. 일하느라 노느라 혹은 먹느라 날마다 '해야할 일'들로 빼곡하게 들어찼다. 동동거리다 보니 금요일. 어제 외근에 이어 다시 돌아와 야근까지 하고(드문 일이긴 하나 그렇다고 아니 피곤한 것은 아닌지라) 아홉시 넘어 집에 들어오니 그저 물 먹은 솜이다. 신발을 벗고 가방을 털썩 내려놓는데 온 사방... » 내용보기

우리는 이래봬도 문학 청년이라

다시금 '광장'이 읽고 싶어졌는데, 그건 순전히 갈매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주문진 항 근처를 어슬렁어슬렁 걷다 방파제까지 이르렀다. 파도가 철썩이고 바람이 휭휭 부는데 갈매기 몇 마리가 느슨한 비행을 하고 있었다. 나는 쟤네 알바하는 새들이야, 알바트로스. 라고 중얼거렸고 썬은 느닷없이 이명준의 연인이었던 은혜와 딸 이야기를 ... » 내용보기

의 등성이를 넘은 느낌이다. 하나의 계절이 달도 채우지 않고 물러나려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것을 아니 연두색 이파리들이 더 애닯다. 라일락인가, 비만 와도 뭉크러질 꽃들이 뭉게뭉게 향기를 피워올리고 있다. 달큰한 공기가 사위를 감싸고 새들이 쫑쫑 울어댄다. 천지사방에 나리는 이 좋은 볕. ... »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