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journal sombre

창이 너른 집에 오니 밖을 관찰하는 일이 늘어난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눈이 퍼붓고 낙엽이 지는 그런 사소한 일들. 앞 산과의 거리를 가늠하는 사이 공중을 스치는 새들. 오늘은 앞이 자욱하게 흐렸다. 물그릇을 엎지른 수묵화처럼 사방의 경계가 눅눅했다. 살펴본 미세먼지 알림 어플엔 무서운 그림이 뜬다. 그 김에 이제껏 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 냉장고에 든 맥주 한 캔을 서둘러 딴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때는 오후. 그러나 때를 가늠하기 어려운 날씨.

발라드를 듣기 적격인 채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생각해서 미뤄둔 신보를 듣기 시작했다. 다섯 곡을 차례로 듣는데, 나는 타이틀이 아닌 곡에 마음이 간다. Although we say i love you. 애플뮤직이 알려준 영어 이름의 원제는 사랑한다 말해도 라고 했다. 네이버는 김동률 다음에 실수로 영타로 친 tkfk 에도 '김동률 사랑한다 말해도'란 검색어를 띄워준다. 몹시 친절하고 자상하게도. 타이틀인 Reply를 대답 혹은 답이라 짐작했던 나는 답장이란 원제을 본다. 말과 말 사이 어긋나는 지점들. 이상하게 내가 끌리는 그 간극. 우리 말로 된 노래들을 들을 때마다 내게 제일 먼저 와닿는 것은 가사의 흐름. 일련의 문장들이 지어내는 이야기에 매혹된다. 섬세한 가사엔 마음이 저려오고. 그러니 열다섯의 열일곱의 스무살의 나나, 서른 넷이 된 지금의 나나 좋은 가사에 동요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때는 가사와 멜로디를 핑계삼아 펑펑 울었다면, 이젠 눈가를 적시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한낮, 알콜의 힘을 빌림에도 조금만 글썽.

난 네 앞에 서 있어
너는 생각에 또 잠겨 있네
함께 있어 더 외로운 나
어쩌다 이렇게

난 네 앞에 서 있어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채
떠오르면 또 부서지는
수없이 많은 말

나를 사랑한다 말해도
그 눈빛이 머무는 그곳은
난 헤아릴 수 없이 먼데
너를 사랑한다 말해도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 두 눈이
말라버린 그 입술이

나를 사랑한다 말해도
금세 침묵으로 흩어지고
네 눈을 바라볼 수 없어

너를 사랑한다 말하던
그 뜨거웠던 마음이 그리워져
그 설렘이 그 떨림이
어쩌면 이미 우린 알고 있나요
그래야만 하는가요

난 네 앞에 서 있어
너는 생각에 또 잠겨 있네
함께 있어 더 외로운 나
어쩌다 이렇게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끼리와의 불협화음. 신체적 언어로 느낄 수 있는 말 너머의 의미. 서로의 징후를 잘 알기에 맞닥뜨리는 절망. 의사소통의 효용 그리고 그 장애에 관해서는 책을 펴고 줄을 긋고 원론적인 이론들을 외운 적 있다. 시험에 나온다고 하니까. 그것이 중요한 때였으므로. 그러나 언제나 삶은 책보다 두텁다. 하나의 진한 인간관계가 이론의 전체 합을 넘어섬을 아니까.

지금의 나는 그 불완전함을 사랑한다. 머리로 자아내어 내뱉는 말, 상대의 눈빛, 몸동작이 말해주는 마음 그 모두를 통틀어 전달하는 메세지. 그 사이에 빚어지는 간극과 터져나오는 작은 절망들을 사랑한다.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고 탐구하는 마음. 언어 이면의 본질. 그것을 탐색하는 마음들을 사랑한다. 노력에 깃든 정성과 애정이 보여서. 나는 그 마음을 붙잡고 싶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기에.

슈퍼호스트의 왕관

간결한 삶을 찾아 이곳에 온 지도 닷새째. 트렁크에서 꺼낸 짐들은 단촐하다. 입고 온 것을 포함해 외투 두 벌, 바지 두 벌, 신발 두 켤레. 양말은 여섯 개나 되는데, 그건 가방 안 노트북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였다. 작은 부엌에서 용케 무엇을 만들어 먹고(구운 김을 찍어먹을 간장은 에스프레소 잔에 담고, 양배추에 곁들일 쌈장은 쏘서에 담는 식... » 내용보기

여장과 살림 사이

쥐도 새도 모르게 새해가 밝았다. 신년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맥주를 마시며 타로점을 보았다. 이름하여 새해의 운세. 언니는 내 안에 충동이 일렁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언제나 그렇지. 언니에게 보는 타로점은 내 마음을 뜨끔하게 한다. 그렇게 마음껏 일렁이자며, 우리 언제고 또 특가로 나온 싼 표를 잡아타고 떠나자는 의기투합을 했다.&... » 내용보기

눈물을 거두고

결혼하고 첫 해 겨울, 우리는 몇 가지 크리스마스 장식을 샀다. 그중 가장 오래 사랑받은 것은, 니트로 짠 산타 가랜드. 옅은 인디언 핑크와 회색이 주가 되는지라, 크리스마스 시즌이 지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적당히 게으른 탓에 가랜드는 이듬해 봄까지 걸려있곤 했다. 올해는 아무런 크리스마스 장식을 달지 않았다. 마당에 심은 전나무에도, 식탁 위에도, 창... » 내용보기

세밑 일기

시드니에서 온 트레이시와 제시카가 떠났다. 아침 아홉시 비행기라서, 새벽녘 서둘러 나선다 했다. 나는 느지막히 오후가 되어 집에 들렀다. 빨랫감을 세탁기에 돌리고 기다리는데, 알림 메시지가 온다. 트레이시가 후기를 썼으니 확인하라고. 벌써 도착했단 말인가. 나는 아직 호스트 후기도 쓰지 않았는데. 궁금한 마음에 후기를 확인해본다. 언제나 이 순... »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