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손가락, 미술관

앞마당 같은 미술관 정원을 거닐다 내가 그린 것은 가만히 자리잡은 이층 주택이었다. 이 길을 오가며 여러 번 눈독을 들였었기에, 어쩌면 조금 미화된 그림이 되었을지 모른다. 가지고 싶은 것을 그린다, 그리고 나니 그런 마음이 되었다. 이 길 끝엔 맛있는 김밥집도 있다. 문 열기를 기다렸다가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김밥 두 줄에 국수 한 그릇. 그리고 이따 먹을 요량으로 포장도 부탁했다. 이 날은 원서동에서 한바탕 일을 할 계획이었으니.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꺼내려는데, 직원 두 분이서 나누는 대화가 인상 깊었다. 김밥을 싸던 분이 우리의 테이블을 흘깃 바라보며, '이만 삼천원이야.'라고 말했다. 계산대에 온 분은 '이만 삼천원? 어떻게 이만 삼천원이 나와?' 우리는 묵묵히 계산을 마쳤다. 둘이서 김밥으로 이만 삼천원을 먹는 재주를 지녔다.
어제 오늘은 집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스케치 위에 색을 입힌 후, 간장 종지에 물을 담아와 손가락에 묻혔다. 그리고 색 위에 덮고 문지른다. 그러면 수성의 잉크가 얕게 번진다. 그걸 다시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린다. 색채는 느닷없이 강렬하고, 여러 번 문지른 탓에 종이가 일어나기도 한다. 내 오른손 손가락들은 얼룩덜룩해졌다. 기네스 한 캔과 함께한 결과다. 손 쉽게 대범해지는 비결.

오늘은 얌전히 커피를 홀짝이며 그리기로 한다. 걸어둔 미스티 블루와 백일홍 다발의 색이 많이 옅어져, 지난 여름은 포스터를 붙인 벽이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퐁피두에 갔다. 머무른 집이 퐁피두 지척이라, 내일 갈까 모레 갈까 하며 미루다 마지막 날에야 갔다. 대표 전시는 호크니.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며 걷는 사이, 소유욕이 출렁거린다. 얕은 사람이 미술을 소비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엽서를 사고 마그넷을 산다. 전시 포스터도 산다. 직원은 포스터를 둥글게 말아 원통의 비닐에 끼워주었다. 다음 날, 짐을 꾸리며 깨닫는다. 이걸 어떻게 들고 다니지. 캐리어엔 당연히 넣을 수 없다. 에코백은 이미 잡동사니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 원통을 늘상 한쪽 팔에 끼고 다녔다. 깁스 같은 모양으로. 깁스는 깁슨데, 겉면에 퐁피두라고 써 있는 깁스. 

다행히 포스터는 상하지 않고 나와 함께 귀국했다. 그걸 반대 방향으로 여러 번 만 다음 벽에 붙였다. 마침 새로 온 게스트는 프랑스에서 온 필립. 퐁피두에서 호크니 전시해? 필립이 달에게 물었다고 한다. 응, 지금 전시하고 있어. 종로 사람이 답했다.

일주일간 꽂아둔 꽃다발에서 살아남은 유칼립투스를 모아 다발을 만들었다. 여름이 훌쩍 갔으니, 포스터를 떼고 그걸 걸었다. 처음엔 유칼립투스 향이 훌훌 났는데, 이젠 다 말랐다. 왼편 커튼 너머로 빛이 어룽거리는 것을 그리고 싶었는데, 커피 탓에 흐리게 그쳤다. 맥주 먹으며 그렸어 봐. 언제나 불타는 노을이 될 게다.    
지난 사진들을 들춰보다 여기에 멈췄다. 배경은 옅은 하늘인데, 섣부르게 손을 댔다가 분위기를 망칠까 두려워 펜 뚜껑을 닫았다. 니스에서 다시 이탈리아로 넘어가던 도중 우연히 만난 마을. 한여름의 니스는 해운대나 광안리의 느낌이 났다. 요란하고 북적거리는, 허술한 에코백을 고쳐매게 만드는 방종의 밤. 그보다 이 작은 마을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바다와 마주한 산을 따라 들어선 작은 집들 사이에 이 호텔이 있었다. 아담하고 아름다운, 내가 칠한 것보다 조금 더 낭만적인 빛깔의 벽. 주황을 살짝 섞은 핑크 같은. 이런 마을에서 호텔하면 좋겠다고 나는 말했다. 이름은 서울 호텔. 그건 농담 같은 공상 같아서, 우리는 피식 웃었다.

그림을 다 그린 다음, 들여다 본 핸드폰은 불쑥 지난 날을 끌고 왔다. 일 년 전의 사진을 모아서 보여주는 구글. 나와 달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장소는 정독 도서관 앞 언덕. 정독 도서관 식당. 그리고 미술관 라이브러리. 나는 카키색 트렌치를 입고 웃고 있다. 작년의 오늘, 나는 정독 도서관 식당에서 밥을 먹자고 우겼다. 왜냐하면 이곳은 사라지지 않을 곳이기 때문에. 도서관 구내식당의 김밥과 라면이 우리의 기념 정찬이 될 거라 주장했다. 그 날은 우리가 원서동 집 계약서에 지장을 찍은 날이었으므로. 인주가 물든 벌건 손가락으로 함께 밥을 먹었다.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김밥, 손가락, 미술관. 인생은 돌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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