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과 눈물을 머금은 부엌에서

구기동을 떠날 때 짐을 많이 줄였다. 이사갈 곳이 확정되지 않았을 때부터 잡다한 짐들을 줄이리라 다짐했다. 노끈으로 묶은 책을 알라딘에 팔고, 철 지나 입지 않는 옷가지들을 수거함에 버렸다. 소파베드, 정리선반, 등유난로 이런 큰 짐들은 달이 도맡아 중고거래로 팔았다. 신혼 때 샀던 통돌이 세탁기 역시 쉽게 팔렸다. 세탁기가 팔리기 전날, 마지막으로 빨래를 했다. 잔고장 하나 없이 6년간 열심히 일해주던 세탁기였다.

그렇게 헐렁한 살림으로 새집에 도착했다. 다른 잔짐들은 그럭저럭 정리가 되어가는데, 냉장고와 세탁기가 요원했다. 커다란 냉장고가 버거워 이번에 작은 냉장고를 사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인기가 없어 그런지 생산이 더디다 했다. 일정에 맞추어 받을 수 있을 줄 알고, 보냉백에 아이스팩과 함께 담아온 식재료들은 열어볼 엄두를 못냈다. 세탁기 역시 언제 올 수 있을지 확답이 늦어져, 빨래바구니는 거하게 쌓여갔다. 밥이야 밖에서 먹으면 되고, 빨래도 조금 더 미루면 된다. 그러나 세탁기가 오기 전 해야할 일이 있었다. 그건 세탁기가 들어갈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 새집의 세탁실은 다소 쌩뚱맞은 곳에 있어서, 그곳은 창고로 쓰고 대신 세탁기는 부엌에 두기로 했다. 부엌 하부장을 뜯어 빌트인으로 하려 했는데, 수납장의 크기가 아쉬웠다. 그래서 부엌 한켠에 세탁기와 수납장을 겸한 작업대를 짜기로 했다. 우리는 이케아를 찾았다.

이케아의 쇼룸은 얼마나 완벽해 보이는지. 스무살 내 꿈이 교보에 갇혀 밤새도록 책을 읽는 것이었다면, 이제 나의 선택지는 이케아로 향한다. 소파와 침대에 번갈아 눕고, 부드럽게 열리고 닫히는 서랍에 밤새 감탄하겠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거다. 생활의 냄새가 없는 말끔한 쇼룸. 거기선 묵은 김치통을 비우고, 상한 바나나를 버리며 초파리와 사투를 벌이지 않아도 된다. 내 안에 지지고 볶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한바탕 지지고 볶는 날들이 지났음에도 미미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게 강력히 주장하여 얄쌍하고 작은 냉장고를 사게 된 연유이며, 뭐든 눈에 보이지 않게 다 집어넣을 빌트인 수납장을 꿈꾸게 된 이유다. 물기 없는 주방. 알약 먹는 세상. 이런 비현실을 꿈꾸는 나다.
이케아에선 집에 방문해 실측하는 서비스부터, 공간 구성을 기획해 제품을 추천하고, 배송된 제품을 직접 조립해 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부엌의 경우 단순 조립이 아닌만큼 계획부터 시공까지의 별도의 팀이 꾸려져 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모든 서비스엔 각각의 서비스 피가 붙는다. 우리는 용기를 짜내어 배송만 받기로 했다. 처음엔 그조차 직접 실어 나르려 했으나, 180센티에 달하는 싱크대 상판이 문제였다. 그것을 모닝에 어떻게 실을 수 있을지, 나는 기아차 홈페이지에서 모닝의 전장 사이즈를 알아보기까지 했다. 결론은 하나, 상판에 동그란 구멍을 내어 내 목을 칼처럼 끼운 채 운전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그쯤에서 곱게 단념하고 배송을 기다리기로 했다.

드디어 배송이 완료된 날. 이게 어떻게 완성될까 싶게 납작하고 견고한 패키지들을 앞에 두고, 달은 전동 드라이버를 꺼냈다. 나사와 브라켓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과연 우리가 연필로 슥슥 그린 그림이 실현될 수 있을지. 우리도 그게 궁금했다. 달이 수납장을 만드는 사이, 나는 함께 배송된 ㄱ자 드라이버로 소품들을 조립해나갔다. 스툴, 협탁, 행거에 이어 암체어까지. 소박한 악력으로 피어난 가구들. 달은 조립 안내서를 펼치며 이케아가 어른들의 레고같다 했다. 물론 처음 시작할 때의 일이다. 하나씩 털어넣은 공진단이 무색하게 우리는 피곤에 겨워 예민해졌다. 그러나 다음날 세탁기 설치기사님이 온다고 하니, 배치할 곳 모양은 잡아줘야 했다. 새벽 한 시가 넘도록 작업이 이어졌다.  
세탁기를 무사히 설치하고, 이어 각 장마다 다르게 배치한 서랍과 문짝을 달기 시작했다. 레일을 달고 서랍을 달고 문짝을 달고 다시 손잡이를 다는 과정들. 완성한 서랍이 아주 섬세하게 닫히는 걸 보면서 우리는 감격에 겨워했다. 며칠 묵은 빨래들이 말끔하게 세탁되는 것을 보고도 기뻐했다. 을지로의 목공소에서 길이에 맞게 상판을 자르던 날, 고조되던 갈등은 우래옥에서 식혔다. 육향 가득한 위안을 안고 돌아와 다시금 일에 매진했다. 주말이 어찌가나 싶게 흐르고, 드디어 완성된 부엌.
빈 액자틀에 얻어온 초판서점 포장지를 끼운 달의 작품은 부엌에 자리잡았다. 창백하게 시린 led 백색등을 처단하고, 예전에 선물 받았던 빈티지 스탠드도 달았다. 이것도 달의 아이디어다. 덕분에 설거지 연구소 같은 우리 싱크대. 조금 전 인턴의 마음으로 주말 동안 밀린 설거지를 다 마쳤다. 한껏 성장한 기분이다. 달은 이제 전기 배선 공사는 쉽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원서동 집 전등을 달 때 감전되었던 것은 옛날 일이다. 나 역시 말할 수 있다. ㄱ자 드라이버로도 왠만한 건 다 조립하겠다고. 나의 오른손은 강해졌다. 고무장갑을 낀 달의 손도 그렇다. 삼청동 강철주먹들이 여기 있다.  

산과 물이 맑고 인심 또한 맑고 좋은

우여곡절. 한자에 숨겨진 뜻이 있을까 싶어 어학사전 탭을 여니 영어사전의 번역이 눈에 들어온다. twists and turns, ups and downs. 정말이지 그랬다. 무사히 전입신고를 마치고, 허리를 펼 새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다분히 숨이 가빴던 것은 엉겁결에 잡아버린 약속 덕분이었다. 말하자면 사연이 길다. 페트라는 지난 여름부터 가을까지 ... » 내용보기

이사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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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동 집의 여름

구기동 집의 여름. 이 여름에 많은 일들이 줄줄이 일어났다. 그래서 무엇에 관해 쓰고 싶어져 노트북을 열려고 하면, 그걸 가져온 다른 일이 떠올랐다. 그 일은 물론 또 다른 일이 가져다 준 결과다. 그래서 뭔가 쓰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장황해졌다. 줄줄이 소세지 같은 날들이다. 결국 나는 제일 먼저 고양이들 이야기를 꺼... »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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