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시청어귀에서 밥을 먹고 덕수궁에 갔다. 전시회를 보고 까페에 갔다. 친구는 키위주스를, 나는 맥주를 마셨다. 데미타세 잔에 담겨나온 땅콩을 오도독 오도독 깨물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들. 친구는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부푼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지리한 일상의 한 줄기 빛. 나는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하고 싶은가. 지난주 새로운 강좌의 첫 수업을 듣고.. 한 시간 후 환불한 사람으로서 아직 갈 길이 멀다. 잠시 들린 화장실 문에는 유명한 쿠킹클래스 광고지가 붙어있었다. 수업료 팔백만원. 입학금은 제외한 비용이었다.
나에게 지금 팔백만원이 있다면, 같은 문장은 흐뭇한 상상들을 불러온다. 고단한 출근을 앞두고 천근만근의 무게로 누운 밤, 백에서 거꾸로 세어 스물 언저리에 닿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리 한 켠에서 해야할 일들이 하나둘 신경을 건드리는데, 그런 나를 곱고 단 잠으로 이끈 것은 내가 로또에 된다면, 에서 출발한 상상(혹은 망상)이었다. 꽤 구체적인 플랜이 신기루같은 지도를 만들었다. 축적의 단위는 무려 억. 상상 속 오아시스의 거상이 된 나는 친구들에게 얼마씩 쥐어줄 생각까지 했다. 그리고 우린 다함께 놀러가는거다. '이프 아이 캔 플라이' 로 가정법을 배운 아이들이 자라 자라 이런 어른이 된다.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가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인걸까.


혼자 영화를 보러갔다. 종로 1가 표지판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한 달만에 만난 달과 나는 헤어지기 아쉬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늦은 밤 덕수궁 돌담길을 돌고 돌고 구세군 중앙회관 구석 벤치에 앉았다. 순찰을 도는 경찰이 몇 번 우리와 (아마도 대사관의) 안전을 확인하고 사라졌다. 걱정도 많으시지. 사귄 지 한 달 된, 그리고 이제 세번째 만난 더없이 순하고 착한 시민들이 시위라도 할 것 같은가? 아무렴 얌전하게 앉아 오순도순 음악을 나눠들었다. 이미 자정은 훌쩍 넘고, 초여름 모기들이 내 다리 언저리에서 파티를 벌이는 밤. 폴의 여리고 여린 라이브는 끝난지 오랜데 그래도 헤어지기가 싫었다. 기억난다. 그때 세상을 밝히는 것은 편의점, 파출소, 그리고 가로등. 동화면세점 건물 앞 비스듬한 나무 데크에서 맨발로 놀았다. 놀다가 지쳐 누웠다. 종로 1가 표지판과 코리아나 호텔을 등지고서 한참을 떠들떠들 웃고 놀았다. 이 드넓은 거리가 우리 것만 같았다. 새까만 맨발을 까딱거리며 누워있자니 희뿌여니 밝아오던 새벽. 첫 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그제야 안녕 하고서 헤어졌다. 한두시간 후 육과 영이 분리된 채로 출근했었다. 군인과 사귀는 것은 보통 체력을 요하는 일이 아니었다. 기대수명을 깎아먹는 일임을 그때는 몰랐다. 더불어 언제 휴가를 쓸 수 있을지, 설령 미뤄지고 또 미뤄지거나 누군가 미사일을 쏘거나 잠수함을 보내거나 거기에 1번이라고 써있거나해도 그러려니하고 인내하는 일. 화내며 벽을 쳐도 밤 열 시 전에 쳐야한다. 발을 굴러도 침대 위에서 굴러야 한다. 꺼이꺼이 목놓아 울려고 해도 이불 속에서 울어야 한다. 참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상대는 국방부였다.

그렇게 유약하고 미숙하던 꼬꼬마들이 이제 좀 컸다. 좀 컸다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 나중에 어디에서 살까, 이런 이야기가 그리 나중이 아니게 되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울컥, 하는 기분이 든 것은 나 어릴 적 살던 동네에 구경가서 그런지도 모른다. 어쩜 그 작은 동네는 변한 것이 별로 없었다. 심지어 그때 가던 빵집이 그대로여서 우리는 빵과 커피를 마시며 몸을 녹였다. 동생이 턱을 찧었던 놀이터도 여전했고 문방구 앞 백원짜리 뽑기들도 여전했다. 동그란 배를 까고 앉아 차가운 청진기 촉감에 몸을 떨던 소아과도 그대로였다. 어린 남매를 키워낸 부모님의 집. 유형의 공간 너머로 보이지 않는 손길, 먹이고 입히고 재운 수고들을 이제 알 것 같다. 우리도 그런 곳을 찾게 되겠지. 함께 사는 공간을 상상하다니 묘한 기분이었다. 로또 신기루는 흩어지고 사라져도 진짜 세계가 눈 앞에 어렴풋이 보인다. 그 곳으로 한 발짝 다가선 그런 기분.
그래서 한껏 어른스러워진 우리는 다음날, 고로케를 나눠먹고 장화신은 고양이를 보면서 눈물날만큼 웃었다. 그리고 홍대입구역에서 댄스배틀을 재현했다. 어그신고 플라멩고 스텝 밟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해냈지. 그러니까 우린 다 할 수 있을거야. 하나둘씩 착착착. 이것 봐, 리듬 좋잖아. 착착 착착착.
최근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