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는 주말 여행. 하긴 인생이 다 느닷없지 않겠어. 일상

지난 주의 끝자락, 비가 몹시도 내렸다. 
폭우가 쏟아지거나 말거나 달려온다는 달이 있기에 주말 내내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보고 영풍문고나 반디를 어슬렁거리는 등의 광화문 한량 놀음,
지인의 공연을 보고 맛있는 밥과 빙수를 먹어주시고 놀이터에서 노닥거리는 등의 졸업생 놀음을

계획하고 들뜬 토요일 점심. 마음을 툭 떨어뜨리게 만드는 문자와 다급한 전화가 왔다. 멀 리 서.

그때 나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지난 주 내내 한꺼번에 줄줄이 밀어닥치는 일들.
격무에 시달리느라 줄곧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고 뭉친 어깨는 더욱 뻣뻣해지기 일쑤. 날도 후덥지근.
고생한 것이 무색하게 주말이 되도록 일거리를 싸들고 퇴근해야 했으므로 내내 무거운 마음.
차라리 날 죽여라 날 죽이라고오.. 얼굴에 써붙이고 다녔다. 게다가 늘 부족한 잠. 잠. 잠.

그럼에도 전화를 받고 네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 모든 것들은 한낱 얽힌 실타래 뭉치가 되었다.
주저함 없이 슬쩍 구석으로 밀어놓고 네게 말했다. 

그럼.. 내가 갈게.

그래서 느닷없이 네게 가는 길. 사실 7월 들어, 내가 힘들다고 징징대는 것이 무안할 정도로 달은 바빴다.
새롭게 바뀐 환경과 자리에 적응하느라. 야근 야근 야근. 
몸이 힘들어 피곤한거야 그렇다쳐도 이처럼 마음이 힘들어 하는 모습이라니.

남도로 향하는 기차. 비를 뚫고 역으로 가는 길, 툭 부러져버린 우산이 아쉽지 않게 차창 밖은 쨍했다.
마치 비행기 안에서 바라보는 것만 같은 하늘과 구름들. 예쁜 초록색 들판.

ktx에서 론리플래닛 읽는 코스모폴리탄.
달은 내 손톱을 보자말자 외쳤다. 메로나돋네..!

광주. 처음 와보는 도시. 정말 오랜만에 보는 모자는 여전히 귀엽고 듬직한 모습.
(길을 잘못 들어 언덕을 내려가려는데 알고보니 인도. 마주 걸어오는 사람들 이상으로 당황한 우리.
 그런데 별로 머쓱해하지도 않는 모자. 식겁했다...... 지나치게 귀여우면 곤란해. 모자야.) 
그리고 2주만에, 그렇지만 늘 그립고 보고싶던 달.
늘 그립고 보고싶어 다음에 만날 땐 이렇게 저렇게 인사해야지 다짐한 것들이 무색하도록
항상 대책없이 수줍기만 한 우리의 재회. 그냥 어허허허허허 하며 바보코스프레 제대로 했다.

멀리서 납신 나를 극진히 대접하겠다며 뫼시고 향한 곳은 어느 구석진 골목의 한정식 집.
여기 진짜 맛집 맞아? 의구심이 들었던 것은 가게 안 우리만 덩그러니 있었기 때문에.
뻘쭘하고 어색하게 앉아 있자니 차차 들어오는 상.

으악 어떡해. 이게 뭐야. 말도 안 돼. 응?

대단하다.. 맛있어서 죽을 것 같아. 시작부터 이렇게 감동을 주다닛. 정말 최고다. 중얼중얼하며 정줄 놓고 먹다가
옷깃에 흘리기도 수차례.... 흔적을 보며 오래토록 기억하고 싶었거든요...

흑백의 사진에서 보던 도청과 소설에서 읽던 금남로.
허름하고 빛바랜 건물의 외벽에서 세월 탓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총탄 자국들을 보면서
뭐라 말 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숙연해져 가만히 서있던 우리.
근사하고 화려한 모습의 기념관보다 이렇게 말없이 서있는 도청이 훨씬 많은 것을 던져주는 것 같아.

맑은 밤하늘에 반달이 떠 있는 모습은 더없이 전설 같아서,
우리 만날 때면 항상 뭔가 좀 이상해. 비현실의 연속이야. 마법같잖아.
라며 지극히 지들중심적인 세계관을 나누며 시내 곳곳을 산책했다.
서울은 계속 폭우가 내린다는데 이 곳은 완벽한 여름밤. 그래서 나는 좀 민망하기도 했던 것이,

이날의 드레스 코드는 일명 '장마돋네' 였으므로.

레인부츠를 신고 돌아다니니 참으로 덥기도 하여 머리를 틀어올려 목덜미를 훔치던 밤.
남자친구가 가방을 들어주는 것을 애정의 척도로 삼는 이들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나
(옷과 신발, 악세사리와 가방까지를 포함해야 완성인데 그것을 왜 스스로 훼손?) 이지만 이날은 순전히
덥고 지치고 힘들어서 옛다, 이걸 메어주렴. 하고 묵직한 에코백을 건넸다. 달은 충실한 셀파가 되어주었다.

이 셀파.. 참으로 마음에 든다. 24인치 캐리어에 어떻게 (구겨)넣어갈 수는 없을까.

바람이 살랑살랑 이는 천변을 걷다 목이 말라 무심히 들어선 까페. 문을 열자말자 귀에 꽂히는 것은 펩톤의 음악.
꺄옼. 알고보니 직접 로스팅도 하는 멋진 까페. 낯선 도시에서도 발휘되는 나의 촉!

벽면엔 lp판들도 꽂혀있었다. 들어보고 싶어했으나 무심한 알바생덕에 좌절.
정직한 키위주스나 아메리카노에 몸서리치던 달의 귀여운 입맛.
허나 끝내 시럽을 거절한 것은 아마도 10cm의 영향인가요.

야심한 밤, 조선대학교에 들어선 모자. 창을 열어두고 캠퍼스를 '달리며' 10cm를 들었다.
캠퍼스 크기에 관해서라면 밑도 끝도 없이 할 말이 많아지거나, 혹은 침묵을 고수할 수 밖에 없는.
소박하고 아담한 학교 출신 둘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와. 호오와. 우워어어.

우리 대학교 탐방 온 고딩같다.
하아.. 그래, 대학가면 잔디밭에서 놀 거라는 로망이 있었지. 
너네 잔디밭 없었어?
응. 그래서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서 술 마셨잖아.
 
특히 사회과학 도서관은 초큼 짱인듯.. 아이비리그 돋네.....
그래도 애교심 투철한 나의 결론 : 에이, 셔틀타고 다니려면 힘들겠다. 비밀통로 많은 우리 학교가 더 좋아.
... 국수주의는 뿌리깊은 컴플렉스에서 싹트는가.

맛있는 것 많은 도시에 왔으니만큼,
시시각각 뭐든지 먹고 마시며 희희낙락 향연을 즐기겠다는 결심은 어디 갔는지 다시 시작된 금식 수행.
허기진 육신을 이끌고 충장로 골목골목을 누비며 역사와 전통있는 로컬 맛집을 찾겠다!
했지만 너무 배고파서 그냥 눈 앞에 보이는 가게에 들어섰는데,
 
으잌. 허접한 폰카로는 담지 못 할 엄청난 내공의 인테리어.

특히 카운터 뒤편 사다리 놓인 서가를 보고 침을 막 흘리다 못해, 여기에 살고싶다 드립.
게다가 퀄리티 대비 지나치게 저렴한 가격. 왘. 역시 광주다. 너를 역사와 전통의 로컬 맛집으로 임명하겠다.

으아닛, 식전 수프의 귀염돋는 포스를 보게.

그리고 야금야금 재창조.

골목골목을 거닐며,
여기는 학교 올라가는 길목 같아! 리치몬드 앞 길가.
여긴 포에버21인데? 이쯤에 명동교자 있고.
이건 청계천 같다. 근데 청계천보다 훨씬 예쁘고 좋으네.

하며 서울촌아이 포스를 내뿜었으나, 광주는 단박에 마음에 쏙 들었다.
심지어 파리바게트 빙수도 지나치게 맛있어..
하긴 뭔들 맛있지 않으랴, 유일하게 망한 선택이었던 길거리 과일주스.
복숭아는 어디 가고 그저 차가운 황도 국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으며 좋다고 헬렐레.

마음 같아선 충장로 한복판에서 '달이, 내꺼다!' 외칠 수도 있었으므로.
 
치과 간판에 그려진 무서운 충치 그림을 보고 잠시 주저앉아 눈물 글썽이고.
(달은 진짜 진료받고 싶어했다. 간판보고 왔어요. 라며. 부들부들 떨며 절대 안 된다고 만류하는 나..
 알고보니 일요일. 뭐래...)
바라본 하늘에 지극히 여름다운 별이 총총 박혀 있어 감동하고.
그러다 떠날 시간이 가까워져 갑자기 마음이 쌔하다가.
그래, 내일 피곤해도 그냥 막차타고 가야겠다 결심하고.
네모반듯한 건물들에 전형적인 네온사인들이 번쩍이는 동네를 지나며 근본없다 비난하고.
그래도 그런 신도시의 장점인 한적한 공원을 찾아, 모자의 창이란 창은 모조리 열어놓은 채 밤바람을 맞고.
앞유리도 열렸으면 좋겠다는 달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냅다 깨버리려다 관두고.
풍류에 취해 우리가 이 근본없는 동네의 왕이다, 자화자찬하고.
너한테 애기 냄새 난다. 꼬질꼬질한 애기 냄새. 하아.. 한 대 칠까. 근데 사실이니까 참고.
달달돋는 모다의 음성을 배경으로 이제껏 우리에게 있었던 많은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광주역.

남자친구랑 기념일이 곧 다가오는데, 저녁식사 할만한 근사한 곳 추천 부탁드려요. 란 글에 빠지지 않고
회자되는 맛집 오브 맛집. 김밥헤븐에서 마지막 식사. 시계를 들여다보며 마구 우겨넣는데도 맛있어......

나는 콩국수를 먹을테니 너는 편지를 쓰거라.
여기 불 좀 꺼주시겠어요?

'나한테 편지 써와요.' 라고 존댓말 쓰며 말한 게 얼마전인데, 달이 주는 특별한 페이퍼가 어느새 세 권째.

차창 너머로 안녕, 하고 헤어지는 길. 홀로 앉아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깨었다가 하다보니 새벽녘 용산.
저린 다리를 펴고 감긴 눈으로 택시를 타고 집에 와 잠시 기절했다가, 
찔러넣어준 홍삼팩을 자시고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서 무사히 출근. 
했다가 퇴근하고 비몽사몽 잠들어 겨우 정신차렸다. 남은 홍삼이 어디있지.....

몇 주 못 본다는 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다만 지금처럼 통화하기 어려워진다 생각하니 문득 드는 애틋함.
그렇지만 지금의 이 애틋함과 아쉬움도 참 좋다고 말한 우리니까 별 걱정은 되지 않는다.
다시 만나는 날, 나는 좀 더 꼬질꼬질한 몰골로 거지포스 풍기며 달려가 와락 안겨야지.
이래놓고 또 머쓱하게 ..안녕? 하고 말지 모르지만.

부디.. 담대한 거지가 되어 돌아오기를.

이글루스 가든 - 하루에 한장. 사진 일기를 쓰자!

덧글

  • Road Camelot 2010/07/20 10:49 # 답글

    대단하다.. 맛있어서 죽을 것 같아.



    어쩜 글을 이렇게 새콤달콤 맛있게 쓰시죠? :)
  • 한량 2010/07/23 16:32 #

    으잌 왜냐면 진짜 맛있었거든요!
    광주 좋아요 ㅎㅎ
  • 2010/07/22 17:1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0/07/23 16:35 #

    아항 그러셨구나! 정말 좋던걸요?
    전 처음 가봤는데 뿅 반했어요 ㅎㅎ
    달이는 광주로 옮기게 되었답니다.
    이번에 한번 꼽아봤는데 은근 가 본 도시가 꽤 되더라구요 신기했어요!
  • 최유달 2010/07/24 01:29 # 답글

    주말엔 유보영 치과에 가 볼 생각이다.
    치과에 안간지 12년쯤 되다 보니 이제 한번쯤 가볼 때가 된 것 같아.
  • 한량 2010/07/24 06:59 #

    아 제발 이역만리 타국에서 내 이가 다 시려온다 아으!
  • 최유달 2010/07/24 01:31 # 답글

    글고 사진을 보니 너의 셀파 많이 슬림해졌다.. 원래도 슬림했지만.
    3주동안 쳐묵쳐묵하고 열심히 운동할께.
    튼튼셀파가 되어야 네가 고려장할 나이가 되어도 업고 다니지 ㅎㅎ

    거기서 안씻어서 아기비린내 풍기고 다니지 말고(넘 매력적이어서 안돼)
    매일매일 발은 씻고 자거라!
  • 한량 2010/07/24 07:03 #

    운동해서 몸 만드는 건 얼마든지 환영인데..
    고려장이라닛, 난 무조건 순장이라구 각오해두는게 좋을거야.
    글구 발가락 사이까지 뽀득뽀득 잘 씻으마 홍홍
    오늘 프렌치들이 좀 꼬였솨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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