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다녀오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되어


7월 21일 ~ 8월 13일
바르셀로나 인 - 포르토 아웃
(Un sueno de la noche del pleno verano)

여행의 이름을 언 쑤에뇨 어쩌고 하면서 한여름밤의 꿈이라 잡았지만, 사실 진짜 이름은 따로 있다.
'Fire on feets' 이라고 일명 '발등의 불'.
아악! 뜨거웡!

꼬꼬마 때 대항해시대에 중독되었던 기억이 있다.
시나리오대로 꼼꼼히 진행하면 각 대륙에서 보물을 얻고 블라블라.. 세계를 제패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저 항해사 구해서 편하게 무역하고, 선전포고는 되도록 피했으며, 비슷한 이유로 동맹도 조심했고,
결정적으로 술집에서 아가씨들 술 사주느라 어린 날을 다 보냈다.

대학생이 되고 보니, 옴마야. 대항해시대 온라인이 나오는 바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게 피씨방 폐인이구나, 
하는 체험도 했다. 각 도시를 돌면서 옷이며 신발을 모아 컬렉션을 만드는데도 심취.
밤을 꼴딱 새고 학교가는 길이면 (시험은 쳐아하니.. 아 기특한지고)
새벽녘 출근하는 사람들 머리 위에 아이디가 떠 있는 듯한 환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지하철 역무원 아저씨 보고는 '어어, npc다 npc.' 이렇게 중얼거리며 젊은 날을 보냈다.
(다행히, 인도 찍고 나서 그만두었다. 아아, 후추의 향기여.)

거친 항해를 마치고 선창 가득히 이국의 향을 풍기는 향신료나 비단이니, 산호니 하는 것들을 싣고 
돌아와 정박하던 때. 그저 고향같고 안방같고 익숙한 모니터 앞 정든 마우스 오른쪽버튼, 왼쪽버튼 같던 도시들.
리스본이나 포르토 같은 이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하여 떠난다.

(게다가 먹을 거 엄청 많다는 말에 벌써부터 아밀라아제 다량 분비. 
산해진미가 넘쳐나는 건 말할 것도 없으며 마카오에서 맛보았던 에그타르트를 포르투갈에서 먹게 되다니. 

그대는 간 곳 없어도 나의 혀는 그대를 잊지 못 해..  in Macao
게다가 '빵'의 원조지 않나. pan! pan!!! pan!!!!!! 아무거나 먹어도 다 맛있대! 이런. 탄수화물 돋네....
여기서 그칠쏘냐, 츄러스를 핫초콜릿에 찍어먹는 게 스페인 아침 식사란 말에 달다구리 중독자는
벌써부터 금단증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하악하악하악.. 아침을 원래 왕같이 먹으라고 하잖아..나는 왕이다.
게다가 샹그리아! 오~ 샹그리아~ 오~ 샹그리아~♬ 피레네 산맥 넘어 개선문까지 춤출 기세로 신이 났다.)

3월에 항공권을 끊어두고 바쁘디 바쁜 날들 속에서도 제일 큰 일은 해결했다, 하며 안도했다.
4월엔 슬슬 정보를 찾고 5월부터는 루트를 정하고 6월엔 확정적인 예약을 하고
그 와중에 호시탐탐 환율의 추이를 지켜보고 적절한 시기에 환전을 하자.
 
던 계획은 모조리 팔랑팔랑. 간 곳 모르게 날아가고.
어젯밤 자정이 넘어 달과 통화하며 약간 울먹일 뻔 하였다.

나 내일 출발하는데.. 여태 항공권만 있네?

루트도 안 정하고 그러니 숙소도 정할 리 없고, 도시 간 이동 경로는 말할 것도 없으며,
들러야 할 곳, 봐야할 곳, 먹어야 할 것, 살 것들 목록은.. 있을 리가 없으니 어찌하지.

달은 위로했다. 
음.. 그런 여행이 더 재미있고 좋을거야. 네 눈에 보이는대로 귀에 들리는대로 따라가.
... 그래도 첫날 숙소는 정하자. 응?

인천에서 여유있게 가자고 택한 오후 비행기 덕에 바르셀로나 공항엔 자정 무렵 떨어지고.
이를 어쩌지? 하고 물었을 때 주변인들의 대답 중 가장 멋졌던 것은
'노숙해라.' 였다. 노숙하기엔 공항이 제일 안전하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여차저차 징징대길 멈추고 밤을 새며 이런저런 정보를 종합해 얼기설기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은근히 차오르는 자신감.

그래, 나 은근 가진 거 많다구.
유로도 있고 (이것도 오늘 뉴욕으로 떠난 목소리3이 꼬셔서 며칠전에야 겨우 환전)
금색 비자 카드도 있다. 론리플래닛도 있다. 필름도 10롤이나 있고. 여권도 있다. ... 복사본은 없지만. 핫챠!

3주가 넘는 여행을 한다하니, 지인의 걱정 한 자락이 떠오른다.
'그러다 너 집시되는거 아니니.' 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응, 내가 유로 좀 벌어올게.'
여권 잃어버리면 진짜 집시될 기세..
아니면 스페인의 명물 소매치기로 전향할 기세...

얼마 간 지인들의 주소를 열심히 수집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고 그저 '느이집 주소 좀 불러봐' 했을 때, 반응들은 가지각색이었다.

1. 가장 일반적인 반응 : 주소는 왜?
   응, 술먹고 쳐들어가려고. 암튼 불러라 빨리.
   하면 대부분 불러주었고, 올 때 양손 무겁게 해서 오라는 옵션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2. 쏘쿨한 반응 : 서울시동작구 .. 블라블라.
   스토킹을 겁내지 않는건지 아니면 애타게 바라는 건지, 이토록 쉬운 남자도 있었다. 

3. 약간 희귀한 반응 : 뭐? 너 혹시 결혼하냐? 청첩장 보내게?
   음... 아니야.

4. 나의 계획을 꿰고 있는 반응 : 오~ 스페인 이제 곧 가는건가?
   응. 이제 간다. 근데 이런 반응은 약간 김새잖아!!!

5. 나의 계획은 모르지만 대책없이 좋아하는 반응 : 왜? 갑자기 기대되게 왜 그랭~
   음.... 넌 아니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6. 베스트 오브 베스트 : 뭐야? 너 왜 그래? 진짜 너 맞아?
   메신저에서 주소를 물어보았을 뿐인데, 갑자기 급 당황하며 존재론적 질문을 던져대더니 급기야..
   문자가 날아왔다.
  '지금 네이트에서 주소 물어보는 사람 너 맞아? 이상한 사람이 갑자기 주소 물어보고 있어!'
   답문을 보냈다.
   '응... 나 이상한 사람이야. 빨리 주소나 불러라.'

하여 스무명 가량의 지인들 주소를 곱게 들고 떠난다. 이런 것만 공들여 준비하고 그러네.
그와중에 어느날 대뜸 메신저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프리힐리아나에서 만날래?'

이건 뭥뮈. 우리가 지난번 만난게 아마도, 학교 앞. 씩이 송별회였나? 
마지막 만남이 닭날다에서 맥주 마신거였는데 그 다음 느닷없이 프리힐리아나에서 보쟤.
아 웃겨서 원. 껄껄껄. 그래서 냅다 승낙했다. 승낙하긴 했는데...
아직 비행기 티켓도 안 끊었댄다. 그래서 구박모드에 들어갔다. 뭐냐, 너! 그래놓고 거기서 보자고?
그러니 쿨하게 하는 말.

'내일 사올게.'

아니...... 무슨 동네 문방구가면 살 수 있냐구요. 다소 당황돋는 내게 또다시 쿨하게

'너 로밍해가지?'

응....... 그래그래. 거기서 보자. 
지중해와 대서양이 애매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스페인의 산토리니라는 그곳에서
우리 뜬금없이 접선해서 밥이나 먹자. 밥먹고 커피나 마시고 헤어져. ㅋㅋㅋ

(그러고보니 '프리힐리아나'를『타워』에서 처음 접했더랬다. 꺄옼!)


엄마는 이곳저곳 배낭여행을 많이 다녀온 사촌오빠의 이야기를 하며 안전을 강조했고,
(그 베테랑이 유일하게 소매치기 당한 곳이 스페인. 올라......)
자정 무렵 동네친구는 헤어질 때가 되자 갑자기 아련돋는 음성으로
'내가 뭐라도 준비해줘야 하는데..' 와 같은 다분히 면세품 및 특산품을 의식한 발언을 하였고.
(이왕 준비해줄거면 제대로 해줘라. 부추김치나 오이소박이 원츄다..)
잘 다녀오라는 목소리들에게 뭐 사다줄까? 물었더니 스페인 흙, 스페인 남자 에 이어 라는 대답도 들었다.

... 좋은 목록이다... 

7월 말 독서토론의 주제가 금기인만큼, 참여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 징징대었더니
감투연임의 병용이는 '대신 금기를 깨고 오면 되잖아요...' 라는 현자의 답을 내놓았다.

... 알고는 있었지만, 이 녀석.. 지나치게 똑똑한 감이 있다. 

여튼 그런 걱정 및 부러움을 이고 지고 곧 떠납니다. 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핸드폰은 가져가구요.
물론 받진 않겠습니다만.. 인터넷 되면 메일도 확인하고 블로그도 들어와 볼게요. 
영어도 잘 못하지만 스페인어는 더더욱 못하니 한국말 잘 쓰다 올게요. 왠지 다 통할 것만 같아.
지구는 둥그니까.

뭐래.

여튼 ¡H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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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보다 장족의 발전이다. 짐을 챙기는 동시에 인터넷으로 숙소 예약과 부엘링 예매 등을 해냈다.
소원하던 까딸루냐 음악당에서 공연도 보겠구만. 와하하하하하하.
게다가 회원 가입해서 20% 할인도 받으며 스스로에게 초큼 감탄했다. 뭐야.. 나 영어 좀 읽는구나.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위에도 써놓았던, 해외에서 사용가능한 금색 비자 카드가 사. 라. 졌. 다.
그래서 잠시 패닉이지만.. 뭐.. 이후로 사고기능이 살짝 정지했지만....  뭐 어찌 안 되겠어요? 응?

지금 내게 부족한 것은.

금색 비자카드.
(사고기능이 멈춘 관계로) 그라나다 이후의 일정 및 루트. 하하하하하 프리힐리아나는 어찌 갈까.
말라가는? 네르하는? 세비야는? 리스본은? 그리고 포르토까진 꼭 가야 집에 올 수 있단 말이다...
그리고 여권 복사본과 여행자 보험.

중요한 건 다 없는 것 같아 기분이 헬렐레레레레레 하지만.
나는 지금 편의점에 갈테다. 아이스크림 사 먹으러! 잠시 모든걸 잊고 야금야금 퍼먹다 보면
곧 정신이 돌아올테지.. 아.......... 스페인어로 '월드컵 우승 축하해요.' 는 뭘까?

'살짝 데친 문어 먹고 싶어요.' 는?

이글루스 가든 - 여행다니기




덧글

  • 소소 2010/07/20 21:02 # 삭제 답글

    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로 에스빠뇰 배웠던 것이 생각나네요ㅋㅋ
    기억나는 거라고는 올라 께딸 밖에 없지만요!
    조심히 그리고 잘 다녀오세요.
    다녀와서 깨알같이 맛있는 여행기 꼭 올려주세요!
    이왕이면 스페인 남자 사진 왕창 찍어다주세요!!!!!!!!!!!!!!!!!!!!!!!!!!!!!!!!!!
  • 한량 2010/07/21 09:38 #

    오! 저는 프랑스어 배웠는데, 싸바? 싸바비앙? ... 욕 아니어요. ㅋㅋㅋ
    네, 사진도 많이 찍어오고 일기도 써오고
    그림도 그려오고(할랬는데 생각해보니 색연필을 안 샀네요....) 그럴게요. ^__________^
    초큼 막막하긴 한데 (아무래도 카드 잃어버린 영향이 큰 듯, 허나 넌 이미 버린 카드야..)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그냥 다녀올 수 밖에. ^^

    어제는 후배가 그러더군요.
    '언니, 잘 말린 반건조 스페인 훈남 하나 부탁해요.'

    한국와서 물 뿌리면 살아나려나요? ㅎㅎ
  • Road Camelot 2010/07/20 22:28 # 답글

    잘다녀오세요 ( '')/

    돋네한량니임, 하하 :)
  • 한량 2010/07/21 09:38 #

    ^^/ 감사합니다!
    그냥 안 아프고 씩씩하게 뽈뽈거리면서 잘 돌아댕기다 오려구요.
    씩씩돋네요.. ㅋㅋ

    그럼 잘 지내세요! ^________^
  • 바이얼렛 2010/07/22 00:30 # 삭제 답글

    흐흐흐 잘 다녀오너라. 우리는 오늘도 너를 추억....이 아니라 암튼 수다를 떨엇지. ㅋㅋㅋ. 아 나 대항해 온라인 했었는뎅. 세계공부 제대로 되던 ㅋㅋㅋ. 파루에서 열심히 돼지고기 썰던 육즙넘치는 기억만 잇지만. 암튼 부럽다. 건강히 다녀오라. 까맣게 그을려서.
  • 한량 2010/07/22 16:29 #

    시차 적응 안되서 얼떨떠르하다 지금. 어제 모였구나! 캐부럽.. 캿캬.
    언니도 했구나! 나 주점 구석탱이에서 완전 열심히 음식 만들고 렙업에 몰두.
    아 폐인의 기억들 ㅋㅋㅋ 언니 암튼 보고팡! 다들 보고팡.
  • 2010/07/22 17:1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0/07/23 15:10 #

    여긴 오전 8시에요. 좀전에 종소리가 울리는 듯, 아마도 성당 같았어요.^^
    아이팟덕에 블로그도 꼬박꼬박 들어와보네요. 이것도 도시생활에서나 가능할 것 같지만요 ㅎㅎ
    스페인 훈남이는 잘 물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너 한국갈래?'가 스페인 어로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ㅋㅋ 아, 이건 바디랭귀지도 힘든데 ㅋㅋ
  • jiny 2010/09/01 02:42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지금은 이미 여행 끝내고 오셨겠네요~^^

    저도 이번에 비슷한 루트로 스페인가는데
    혹시 카탈루냐 음악당 티켓 할인 해서 보셨어요?

    음악당 싸이트에선 할인 티켓이 없는것 같던데..
    혹시 어떤 싸이트에서 예매 하셨는지 가르쳐 주실수 있으신가요~~
  • 한량 2010/09/02 12:09 #

    엇.. 그 예매 영수증이나 표들이 집에 있어서 지금 확인이 어려운데요. ㅠㅠ
    까딸루냐 음악당 뿐 아니라, 스페인 영화관, 그 외의 공연들을 통합적으로
    다 예매할 수 있는 사이트였어요. 주소하고, 어떻게 하면 얼마만큼 할인을 받을 수 있는지..
    제가 집에 가서 찾아보고 다시 댓글로 알려드릴게요 ^^
  • jiny 2010/09/03 01:14 # 삭제 답글

    아 정말 감사드립니다~
    혹시 이싸이트 아닌가여~?

    http://www.servicaixa.com

    여기 들어가서 회원가입은 했는데 제가 가고자 하는날짜의 공연 할인을 어떻게 받아야할지 모르겠드라구요,,ㅡㅜ
    search 창에서 음악당 이름으로 따와서 검색해도 안나오고..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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