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세비야에서 나는 그저 먹고 마시고 다른 사람이 되어

세비야 터미널에 도착해 낑낑거리며 택시를 탔다. 무엇보다 덥다. 덥다. 덥다.
언니 기사님은 캐리어를 번쩍 들어 트렁크에 넣어준 후 시동을 켜더니
라디오의 볼륨을 조금 줄인다. 흥겨운 플라멩고 한 자락.
플라멩고 리듬과 기막히게 어울리는 운전 솜씨.
코너를 꺾을 때마다 나는 손잡이를 잡아야했고, 룸미러에 걸린 아들 사진은 격한 진자 운동을 반복했다.

그래서 신호에 걸린 틈을 타서 모올래 사진을 찍고서
(하지만 절대 몰래일 수 없는 것은 필카 특유의 셔터소리. 차알칵!)
혹시 브레이크 확 밟으며 무섭게 뭐라고 할 까봐 지레 주눅 들었었다.
하지만 언니 기사님은 더없이 시크하게 호스텔까지 데려다주고 '아디오스' 라고 한다. 나도 아디오스!

리셉션에서 만난 여자아이는 나의 바르샤 지갑을 보고서
흥 칫 핏 뉘앙스의 귀여운 투덜거림.
왜 그러니? 하니
나는 마드리드에서 왔거든 한다.
야 너 좀 귀엽다, 속으로 생각하고서
제일 먼저 묻는다.
여기 가까운 메르카도르 어디니?

알려준대로 더듬더듬 찾아가는데 해가 뉘엿뉘엿 지려 한다.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서는데 모퉁이 기념품 가게가 눈에 띈다.
엽서를 사고서 대롱대롱 가벼운 봉지를 흔들며 장을 보러 간다. 달려간다. 모르는 동네면서.
거침없어 뵈는 카프레제
투박함을 넘쳐 전투적인 냄새까지 난다.
이걸 들고 옥상에 올라가 가까이 보이는 세비야 까떼드랄 야경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다.

세비야는 무서울 정도로 뜨거운 햇살로 기억된다.
이곳은 투우와 플라멩고의 본고장, 당연할 수 밖에.
이런 뜨거운 동네에서 조용조용 건조하고 냉정한 정신(북유럽멘탈이랄까)으로 살기란 어려운 일이겠지.
그래서 느지막히 일어나 완벽한 잠옷차림으로 눈 비비며 오전 내내 밥 해먹고 노닥거렸다.
키친도 조용하고, 나는 느긋하게 요리의 과정을 기록해본다.
본격 살림이 시작되었다.
왜냐면 현금 잔고에 노란불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니까.
호스텔 키친 찬장에서 꺼낸 올리브유 빼고 다 나의 것.
어느 여행자가 양파를 망째로 사들고 이토록 기뻐하나 싶다. 껄껄. 
제일 먼저, 면을 먼저 삶아줍니다. 약 8분 정도 걸리니까요.
소금도 넣어 면에 간이 배이게 하지요. 올리브유도 투척.
어쩌다보니 이다지도 공포영화스런 샷이 나왔는지 몰라도
실상은 평범한 오전의 부엌
베이컨, 소세지, 양파를 다짐다짐
냉장고에서 남의 버터를 훔쳐 썼어요. 버터도벽이 있는건 아닌데.. 여하튼 미안해요.
썰어둔 재료들을 볶습니다. 와! 인덕션 온도도 최고치. 배가 고팠나보아.
한국에서 크림스파게티를 만들 땐 우유에 크림스프가루를 개어 사용하곤 했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휘핑크림버전으로 도전!
(아직 밀가루 루를 만드는 것은 어렵게 느껴져요......)
............
약간 울고 싶어졌다. 진짜.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재생지로 만든 키친타월로 급마무리
자아, 면이 다 삶아졌으면 쪼르르 물을 따라냅니다.
비빔국수 생각하고 찬물에 헹구면 당신은 바보오.
완성! 으하하하하하하 맛있어염 나 좀 능력자구나.....
비노 블랑코, 화이트 와인도 홀짝홀짝.

자신감이 슬슬 붙기 시작해, 난생처음요리에 도전.
별 거 없어요. 훈제연어, 토마토, 양파, 빵, 그리고 퀘소!
크림치즈 으하하하하하
급조한 훈제연어샌드위치
그리고 맥주와 요거트
(포스팅하는 가운데 눈물돋네...... 나 이렇게 여름내내 낮술에 맛있는 거 마음껏 먹던 진짜 한량이었나 싶고)
남은 빵은 크림치즈에 찍어 드링킹
이 밤을 기억한다.
그라나다에서 만나고, 말라가에서 우연히 조우, 세비야에서도 같은 숙소.
현희언니와 옥상에서 한참을 이런 저런 이야기. 정말 많은 이야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배가 슬슬 고파, 새벽녘 키친에 잠입했다.
언니는 우유가 너무 먹고파 병째로 샀다고 했다.
언니, 그럼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진짜 죽음이야.. 각오해.
하고 칼은 빼어든 나.
정말 최고였다.
자화자찬 쩌는데.. 레알 최고였다. 이 저렴한 어휘력이 안타까울만큼.

무엇보다, 면을 삶고 재료를 준비하고 볶는 과정 내내 이어진 우리의 이야기.
여행지에서 만나 이렇게 내밀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사랑 이야기로 몇 시간동안 눈을 반짝일 수 있는 우리는 청춘.
청춘의 위는 넓고 장대하므로 야식을 깨끗이 비워냈다.
나란 인간,
칭찬에 매우 약한 인간.
맛있다고 칭찬을 연발하던 언니 앞에서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언니 언니 그럼 내일은 내가 다른 버전으로 파스타 만들어줄게!
아침은 기약없으니.. 점심 때쯤 연락해!
다시금 칼 든 여인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으하하하 마드리드에서 얻은 고추장.
정말 소중하여 개인 락커에 넣어두곤 했던 저 튜브 고추장.
가끔 락커를 열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못 참겠다 싶으면 뚜껑을 살짝 열고
낼롬 한 입 핥고 다시 넣어두던 저 고추장.
아오..... 이 버전도 최고
이거 뭐 메뉴 델 디아로 팔아도 되겠다 싶구만.
(다소 절실한 소망이었다. 집시나 소매치기의 전망은 어떨까, 장래희망도 다시 쓸 수 있을 재정상태였으므로)
느지막한 오후, 음악을 들으며 후루루루루룩 마셨다.
처음 만들었던 훈제연어샌드위치의 빵은 너무 거친 녀석이었다.
그래서 조금 더 말랑말랑한 흰 빵을 사와 다시금 만들었다.
우왕, 이제 입천장 안 까지는구만.
남은 재료를 섞어 다시 홀로크림파스타
그리고 낮술로 와인 한 잔.
으하.... 통후추까지 등장했다.
나날이 일취월장. 이를 어쩐다 말이냐.
여행와서 자아를 찾고야 말았다.
나 요리 능력자..........
체크아웃 하고 커먼룸. 세비야에서 마지막 점심 식사.
이제 곧 국경을 넘을 참이라, 혹여나 상할까봐 남은 재료를 다 처치한 점심. 
크림치즈 한 통을 다 비우고, 요거트도 해치웠으나. 나의 캐리어 안엔 수줍은 양파 한 알......

휘적휘적 옐로페이퍼를 들추며 싹 비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 포르투갈로 간다............!

2010. 07. 21 - 2010. 08. 13
스페인 & 포르투갈
혼자여행기


이글루스 가든 - 여행다니기

덧글

  • PHOENIX 2010/10/28 23:06 # 답글

    요리들맛있어보여요 특히카프레제 !!
  • 한량 2010/10/29 11:32 #

    제 생애 생모짜렐라를 사 본 것도 처음이었고..
    카프레제만으로 배가 부를 수 있었던 적도 처음이었고... 으하!
    점심시간은 아직 멀었는데 배가 슬슬 고파요.
  • 2010/10/29 09:2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0/10/30 10:15 #

    으하하하 물론 플라멩고 공연도 보고 강가도 걷고 공원에서 멍때리기도 했지만
    알차게 먹은 저 기억들이 제일 좋아요.
    으흐흐

    11월 주말이면 되려 저는 서울을 떠나 돌아다니고 있을 거 같은데 ㅠㅠ
    이를 어떡하나......!
    멀어보였던 11월이 어느새 며칠 후라니, 달력 들여다보고 놀라고 있네요.
    여행 가시기 전에 꼭 뵙고 싶은데..
  • 카이º 2010/10/29 17:09 # 답글

    카프레제!!!!
    올리브도 산지여서 굉장히 맛있겠네요 +ㅅ+
  • 한량 2010/10/30 10:16 #

    네네 ㅠㅠ 짭쪼롬하니 그냥 먹어도 좋고
    샐러드랑 먹어도 좋고.. ^^
  • 스무디 2010/11/01 23:15 # 답글

    ㅋㅋㅋ 나도 파스타 해먹었었는데. 리조또도 도전했다가 거의 생쌀을 우걱우걱 ...ㅠㅠ
  • 한량 2010/11/01 23:33 #

    아 귀여워
    아직 리조또나 빠에야는 도전해보지 않은 영역.
    빠에야는 샤프란 핑계를 대면 되겠지 ㅋㅋㅋ
    리조또 그냥 밥으로 해도 되지 않을까 싶네? 크림소스로 걸쭉하게 해먹고 싶구만.
    크게 깨달은 바야. 다음부터 여행 때 햇반을 세트로 지고 가리다..
    그리고 야금야금 꺼내서 파먹어야지 캬캬
  • 유나 2010/11/05 23:25 # 삭제 답글

    키키
    현희언니한테 들었던 세비야 호스텔 소식을 사진으로 보니
    어쩐지 머릿속으로 상상이 더 잘된다!
    언니 요리솜씨는 정말 최고야!!
    그나저나...
    나홀로 배낭여행에 저렇게 맛있게 챙겨 먹는 사람이.... 있을까?
    나도 다음 여행엔 언니처럼 요리사가 되어봐야겠단 생각이 든다!
  • 한량 2010/11/10 10:55 #

    유나야, 2학기도 한 달여 남았겠네. 대학생이 역시 짱이다. 히히
    보고싶어. 언제 시간이 되려나,
    서울 한번 넘어오기 힘들거 같아 재촉하긴 어렵네 ^^;;
  • 딱히없는데요 2010/11/22 03:09 # 삭제 답글

    이 새벽에 능력자님의 능력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벌렁 입은 한 웅큼 벌려집니다
    아 언젠가 저도 능력자님의 능력을 맛보고 싶어요
  • 한량 2010/11/22 09:44 #

    아 부족하나마 소박한 식사 널리 펼치고 싶습니다 흐흐 기회가 된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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