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가, 그 바닷가 빛을먹고사라져버린

말라가 버스 터미널에 내리려는 순간, 불어온 바람이 발목 근처를 건드렸다.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이곳은 바닷가 마을. 햇살은 여전히 뜨겁지만 바람결은 확연히 다르다.
여기서부터 일종의 아바타 놀이가 시작되었다. 숙소를 정하지 않고 왔기에
(출국 이틀 전, 벼락치기 예약 도중 집 안에서 비자카드를 잃어버리는 만행 덕에..) 저멀리 멀고 먼 곳의
네가 알아보고 예약해주면 메일로 온 바우처를 보고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말라가는 작은 도시다. 그 작은 도시의 도심에서도 조금 더 들어가야한다. 동네에 위치한 작은 호스텔.
테라스에선 바닷가가 훤히 보였다.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바로 모래를 밟을 수 있던 곳.
반대편 코너를 돌면 작은 슈퍼가 나왔다. 주섬주섬 맥주며 물이며 과일등을 담고 있는데
아주 고옵게 고옵게 차린 백발 할머니께서 말을 건다. 그렇게 우린 하몽과 파프리카 사이에서 짧은 대화를 한다.
할머니는 혼자 왔다는 내게 '유 아 브레이브 걸!' 하고 칭찬을 해주신다. 높고 파르르 떨리는 가냘픈 영어다.
나는 할머니의 모자와, 원피스 깃에 단 브로피가 아주 예쁘다고 생각했다. 진짜 앤틱이다.

도착한 날 저녁,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걷다가 나온 작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야외 자리엔 사람들이
늦은 저녁을 먹는다. 나는 안 쪽 자리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엽서를 꺼낸다. 모네의 '해돋이, 인상'.
운좋게 마드리드 티센에서 보게 된 그림. 특별전 하는 줄도 몰랐는데, 좋았지. 엽서도 쓰고 커피도 다 마시고
일어선다. 지갑을 뒤져 1.5유로를 내면서 아저씨들과 인사한다. 꼬레아? 꼬레아! 한다.

짐을 싸들고 가벼운 차림으로 바닷가를 휘적휘적 걷는다. 야자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가져온 수건 하나 깔고
엎드린다. 엎드려서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엽서도 쓴다. 햇살이 정말 뜨겁다.
아이팟이 터지는 건 아닌지 걱정할 정도. 나중에 살펴보니 크레용은 슬슬 말랑해졌길래, 그늘로 옮겨 모셔둔다.
디카며 지갑이며 모두 든 가방은 야자나무 아래에 던져놓고 바다로 향한다. 모래사장에 쪼리도 얌전히 벗어두고.
그리고 정말 마음껏 수영했다. 바다는 적절히 시원하고 물결은 잔잔. 튜브 따위 없어도 무방하다.
나는 아기스포츠단의 노란 모자를 떠올렸다.

그늘에 앉아 놀다가 심심하면 수영하고, 다시 돌아와 볕에 몸을 말리는 시간. 나는 잘 마른 생선이 되는 기분이다.

피카소 미술관에서 본 어린 시절 그림에는 말라가 바닷가가 자주 등장한다. 말라가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이니까. 
띄엄띄엄 바닷가에 늘어선 식당에서 피카소란 이름을 발견하고 웃었다. 야외 화덕에선 생선굽는 냄새가 피어오른다.

육개월도 지난 지금, 내 등엔 말라가에서 태운 자국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다.
말라가에서부터 시작된 우울은 세비야까지도 이어졌다. 나는 이유없이 또르르 울었다.
고속버스 안에선 차창만 바라보고 안 우는 척 했다. 낮의 한산한 버스에선 내가 우는 줄 아무도 몰랐을텐데.
외로웠다. 한밤의 해변을 걸으며 재주소년을 계속 들었다.

이글루스 가든 - 여행다니기

덧글

  • 유달 2011/01/30 00:16 # 답글

    올해는 외롭지 않다 셀파가 함께 하니까
  • 한량 2011/01/30 01:14 #

    짐 나눠드는 이야기 오늘도 생각하면서 깔깔 웃었네 ㅋㅋㅋㅋ
  • 유달 2011/01/30 02:02 # 답글

    누가 이 글 제목을 보고 지구의 환경 문제를 걱정하고 있더라는 소식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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