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날 보내지 마 일상

번역하면 이리 될까? 했는데 그렇더라. 낡은 테이프에서 나오는 음악의 여운. 영화를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서정적인 SF'. 장기제공을 위해 관리되는 아이들. 이런 설정에 몹시도 미래적인 (마치 이말년의 미래분식이나, 미래자동차같은) 그래서 더없이 촌스러운 배경을 깔았다면 읏흠 했겠지만 영화는 반대로 오랜 시간을 그 시절답게 비춰준다. 60년대나 70년대, 80년대. 그래서 어쩌면 이런 일이 실재하고 있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번졌다. 

우리는 들어설 때와 달리 (불이 꺼지기 직전까지 나눈 이야기는 명화 베드씬 모음집) 약간 먹먹한 표정으로 나왔다. 영화의 내용을, 그리고 레알 병자 같았던 키이라 나이틀리의 지난 날을 이야기했다. 나는 헤일셤 꼬맹이들이 입은 영국사립학교 교복(과 체육복)이 어른어른 아른아른. 톤 다운된 스웨터와 잔꽃무늬 원피스 그리고 메리제인 슈즈의 여자아이들과 폴로 셔츠에 짧은 반바지, 곧은 다리, 특유의 미간 찌푸린 표정의 남자아이들. (이 표정은 영국남자가 제일 잘 어울리는 듯) 그래서 제가 영국에 가고 싶은 것은 아니고.

갑작스레 만났는데 그러고보니 마지막 만남이 작년 십이월 송년파티였구나 하여 홍언니는 날 보자말자 '너 결혼했냐?' 라고 하였다. '아니.. 장가갔어.' 농담을 하였으나 언니는 잊지 않고 혼인신고를 하였냐며 캐물었다. 옆에서 보라언니가 웃는데 '얘 진짜 하려고 했다니까 진지했어.'라고 정곡을 찌른다. 우리는 잠시 히히덕댄다.   
나오니 바람이 휙휙 분다. 아.. 나는 맨발에 웨지힐. 배가 고파 동동거리던 우리는 엉겁결에 명동교자로 향했다. 명동? 걷자, 하여 횡단보도를 건너고 또 건너고 지하도도 지나 명동에 도착했다. 그리고 역시나 줄을 서서 기다려 착to the석.
나는 언제나 칼국수와 만두의 조합을 선택했는데, 이날은 비빔국수로 선회. 칼국수 두 그릇과 비빔국수와 밥 두 공기를 야무지게 먹은 우리들. 김치 덕에 혀에선 마늘향이 솔솔 났다. 명동교자의 밀도는 상당하다. 우리는 힘에 겨워 쇼핑을 한다. 이날 우리 셋의 드레스코드는 몹시 상이해서 이상할 지경. 동행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홍언니가 피팅을 하는 사이 보라언니와 나는 각종 악세사리를 걸쳐보며 인도공주 놀이를 하였다. 이리저리 누비며 제각기 손으로 가리키는 아이템들은 역시나.. 누구는 호피와 레깅스에, 누구는 비비드 컬러에, 누구는 심플한 흰 셔츠에. 아니, 흰 셔츠! 이건 오피스걸의 복장이 아닌가?

했지만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홍언니는 지난 금요일, 사년팔개월 근속한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왔다. 등산양말을 사야한다길래, 선물인가했더니 월요일 아침 열 시에 관악산에 갈 거란다. 퇴직금이니 실업급여니 하며 백수진입을 곱씹었지만 마냥 부럽기만 했다. 언니 성격이라면 백수도 그냥 백수가 아닐 것이다. 몹시도 규칙적이고 생산적인 백수가 될 것이다. 아침에 블랙커피 한 잔 마시고 싸이클 삼십분 탄다니 말 다했지 뭐.
자꾸 을지로입구 방향으로 이끄는 나의 속셈. 비타민 돋는 당근바지를 득템하고 마감시간의 백화점을 들릴 무렵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나는 우산도 없어 언니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꼬셔댔다. 네버렛미고오.   
그래서 우리는 정말 맛대가리 하나없는 오꼬노미야끼와 요상야리꾸리한 돈까스를 먹었다. 맛은 진짜 없었는데, 이곳에서의 우리의 대화는 정말 가열찼다. 사회의 부조리함은 논하고 논해도 끝이 없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어 비슷비슷한 이야기만 나올듯하나, 모이면 역시 새로운 시선을 접하게 된다. 너무나 좋다. 우연히 알게 된 우리가 이토록 친밀해지고, 격없이 소통할 수 있어서. 이야기에 나온 지리산 공동체가 그리 멀지 않아보인다. 우리는 이미 여기서 공동체, 우리의 보금자리야 산에 들에 바다에 어디든 없을까. 아, 그런데 소설은 언제 쓰지? 하.

새침한 봄날씨에 온종일 돌아다닌 탓인지, 방사능 머금은 비 때문인지, 계속 골골대고 있다. 특히나 손목, 발목 등의 관절이 자꾸 쑤시는 게 영 이상스럽다. 나만 그런 게 아닌 걸 보면야 역시나 명동의 감기신이 빙의한걸까. 명동의 감기신은 왠지 한중일 삼개국어 능통하실 거 같아. 요즘은 귀신도 능력있어야 먹고 사는 세상이니까.

+ 맨날 먹고 놀고 마실 궁리만 하는 우리라, 부산여행이며 (나는 맛집 네비 당첨) 태국 프로모션 여행 프로그램이며 (근데 허니문이라는 슬픈 이야기가) 오월 연휴의 제주행이며 (가서 마주칠 수도) 동동 떠들어대는데. 새로운 소식에 귀가 이따만큼 커져서 팔랑팔랑댔다. 제주에 집을 빌려 우리를 이끌었던 지영언니는, 이번 겨울 두 달 정도 다시 집을 빌릴 거랜다. 어디에? 하고 물었더니 발리래. 라는 말이 돌아온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고.. 언니 보고싶고.. 효도하고 싶고.. 그래서 올겨울엔 발리에 얹혀살러 가야겠다고 역시나 당사자없이 모종의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아, 발리!
 
이글루스 가든 - 하루에 한장. 사진 일기를 쓰자!

덧글

  • 2011/04/13 00:3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1/04/15 09:08 #

    히히 제가 산을 잘 못 타는거 빼고는 꽤 매력적인 이야기였어요 ㅎㅎ
    저는 아직 한라산도 못 올라가봤거든요.
    아 그리고 안 그래도 어제 달이한테 열심히 떠들떠들했어요.
    광주가면 같이 만나자구요. ^_____________^

    낮엔 봄이지만 밤엔 바람이 꽤 부네요. 저는 콧물을 킁킁 달고 있어요.
    감기 조심해요 :)
  • 유달 2011/04/13 01:51 # 답글

    나도 같이 그누나한테 효도할래
  • 한량 2011/04/15 09:11 #

    그럴까? 낑낑깡깡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열심히 효도해서 발리 갈까 우리? 호호호
  • 바이올렛 2011/04/16 23:16 # 삭제 답글

    아 감기. 쉬이 낫질 않는다. 으실으실.
    부산 기대에 몸이 부들부들 얏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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