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빠와 결혼하면서 바람은 차고 우리는 따뜻하니

#1
잠실, 일찍 도착해 외야에 앉아 노닥노닥. 접어준 신문지를 가닥가닥 더욱 잘게 찢어 말면서 중얼중얼 혼잣말. 고갱님~ 오늘 컬이 너무 잘 나오셨다. 그런데 이 끝이, 끝이 좀 상하셨네. 이번에 새로 나온 에센스 여기 살짝 뿌려드릴까요? 하지만 외롭지 않게 옆에서도 중얼중얼 한다. 뭔가 읊조리는데 야갤러의 모습이 언뜻언뜻.. 너 삼미 같다. 라고 했다가 아, 그건 좀 심하지. 라고 정정. 경기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격분한 응원(및 코치)에 몰입하는데 나는 옆에서 웃겨서 낄낄. 뒷 사람들도 낄낄. 중반부 넘어 조용한 가운데 신이 나서 엘지 응원가를 부르는 이들이 있었는데, 참고 참던 달은 포효했다. 롯데팬은 삼루, 엘지팬은 일루로! 그래서 또 낄낄. 너 이러다 펜스에 달려들고 옷 찢고.. 그러는 거 아냐? 했더니 수줍게 부인한다. 이제 페트병 소주를 살 때가 된건가.. 해도 맥주면 족하단다. 하지만 새벽 닭은 울기도 전에 치맥으로 부활하는 이 곳에서 모태신앙은 영원한 법. 내재된 사직 호르몬은 적절하게 분비되어 스물일곱 봄, 본격 아저씨로 거듭나.. 훗날 아가띠를 두르고 경기장에 난입하는 일만은 없기를. 아멘.

하지만 일찍이 하루키는 말했다. 나폴리 출신과 결혼하고서 이탈리아의 느슨함에 대해 화내는 것은 이상한 거라고. 그건 마치 곰과 결혼하고서 털이 많다고 불평하는 일과 같다고 했다. 그러니 롯빠와 결혼하면서 얌전한 야구관람을 생각하는 건 무리수일테다. 아, 갑자기 생각나는 충마크 사태. 충마크는 외쿡인도 아니고 곰도 아니지만.. 여튼 그런게 있다. 엣헴. 험험.
#2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져 밤의 동네를 산책했다. 해가 지자 바람이 꽤 차가워졌는데 마을버스대신 걷기를 택했다. 손을 잡고 걸으니 벚꽃이 보이고 개나리도 목련도 보였다. 목련을 굽어보는 달도 보이고. 길을 걷는데 어느 횟집의 간판을 보고 부들부들 떨면서 이.. 이말년이다.. 했다. 아, 저 노골적인 묘사, 세심한 터치.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을 나눠먹고서 돌아오는 길. 아까 눈여겨보았던 딸기를 산다. 큼지막한 두 팩에 오천원. 싸게 산 것도 기분이 좋았는데 집에 와 맛을 보니 달기도 엄청 달다. 그 아저씨 남는 게 있을까? 그러게 날도 추운데. 빨리 집에 가고 싶으셨을거야. 하며 사이좋게 딸기를 다듬어 냉동실에 얼려두는 밤.
#3
이태원에서
 
이태원 프리덤을 듣고 보고 맛보고 즐기고 했다. 껄껄껄. 외쿡인들이 지나가며 쳐다보거나 외면한다. 하지만 그대들 어깨가 떨리고 있지 않나. 비트에 몸을 맡겨보란 말이야! ... 재규어 빙의. 남산행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춥다고 품 안에 들어가 꼼지락대는데 목 안에서 자꾸 기침 섞은 옹알이가 터져나온다. 근데 이건 나 뿐만이 아닌걸..
이태원에서 추워서 그랬는지 꽤 맛좋은 커피. 기프트샵에서 스페인국기 마우스 패드를 사주던 달. 마우스 요리조리 굴리며 여행 구상을 잘 하라는 응원일게다. 내려오는 길, 버스 대신 슬슬 걸어내려오는데 자전거들이 씽씽 지나간다. 그리고 자전거 이야기. 나는 자꾸 응, 응 맞장구치며 듣다가 다시 기본적인 질문을 하는 띨띨이인 반면, 섬세돋는 달은 그 예전 자전거샵에서 풀죽은 혼잣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바퀴 큰 거 예쁘네.. 근데 난 작으니까 못 타겠지..' 라고 했단다. 나는 기억도 안 나는데 그 대사 참말로 불쌍하긴 하다. 불쌍한 대사는 불쌍하게 내버려두고 보다 유혹적인 대사를 음미해 보자면, 있잖아.. 로드가 낫겠어..? 아니면 사피아노가 낫겠어? 아 아 아 내 남자가 이런 남자다. 이런 백팔번뇌 급의 질문을 던져놓고 보여주는 건 비앙키나 마지 사진들이다. 프라다를 상대로 밀리지 않다니 대단한 녀석들이다. 아무래도 마음이 기운다. 하아하아 근데 나는 너무 반짝반짝 쌔삥 간지보다야 낮은 채도의 클래식한 색깔이 어엿브더라! 뭐 그렇다구요. 낑낑.
#4
정크푸드스러우나 사실 홈메이드인 저녁 식사. 튀겨서 기름 빼고 있으려니 자꾸 보이지 않는 손이 어른어른 날아온다. 오렌지랑 포도 사 왕! 하고 심부름 보냈더니 소담한 프리지아도 얹어온다. 분홍꽃 화분도 어여쁘다. 꽃이름도 잘 모르는 녀석이 어이꾸 어이꾸 기특해라. 하루가 지나자 꽃이 꽤 피었다. 오늘은 물을 갈아줘야지. 내일은 분갈이를 해야지.

#5
양화대교를 건너는 사이 누구는 커다란 곱등이가 되고 누구는 블랙올리브 빵을 야무지게 씹었다. 치아바타도 마구 물어뜯는다. 허술한 가림막 너머 한강이 넘실거려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만약 빠지면 빵이 젖으니 속상하긴 할 거야. 라고 허세를 부린다. 곱등이는 곱등곱등 떨다가도 마주 오는 자전거 종류와 특징들은 빼놓지 않고 말해준다. 나는 여기서 또 응, 근데 그럼 나도 로드 탈 수 있어? 라고 다시 원점으로 회귀. 커다란 곱등이는 지쳐서 허리가 굽고 다리가 후들거릴지언정 설명은 멈추지 않는다. 차분한 인내심 대단하다. 짝짝짝!
우리는 고대하던 치킨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이야기도 했다. 합정의 벛꽃을 따라 이사간 집 구경도 했다. 그리고 매트에 배를 깔고 납작 엎드려 도도도도 놋북을 두드린다. 어쩌면 낯설고 어려운 관계일텐데 (그러니까 엄연히 예비 시누이 되시겠다) 나는 왜 엄마미소로 함박웃음을 짓게 되는지 알쏭달쏭 알 수가 없네. 급기야 날이 추워 나란히 잡은 손에 허허허허 할배미소 뿌리던 달은 굉장히 흐뭇해하며 쪼끄만 애들끼리 친하게 지내라고 덕담을 하사하셨다.
 
주말의_내_상태.jpg

산책을 하면서 지난 시간을 되새김질했다. 사월에 뭐 했고, 오월에 뭐 했고. 가을께 넘어서부터야 떠올리면서도 픽픽 웃음이 샜다. 우리 이제 왜 안 울지? 신기하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싶다가도 또 새롭고, 매일이 짧다 싶었는데 벌써 일 년이 성큼이다. 우리는 그때 정말 아는 것 하나 없었는데. 좋아하고 나서도 역시 아는 것 별로 없었는데. 뭐가 좋다고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열심이었을까. 이건 평생 갈 미스테리지만, 결론은 항상 달 to the 달.

이글루스 가든 - 하루에 한장. 사진 일기를 쓰자!

덧글

  • 2011/04/19 10:0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1/04/19 20:34 #

    와 역시 예리하시네요. 이태원에서 (우리 그때 갔던 거기 ☞☜) 맥주를 마시는데
    한 모금이 한 모금이 그냥 넘어가질 않더군요. 입 안에서 천천히 음미하면서 꼬올깍.
    그런데 이전과 같지 않았어요.
    내 의지에 상관없이 뭔가에 끌려가는 건 끊을 수 있다는 생각. 너무 거창한가요? ㅎㅎ

    아 그리고 그 싸움은 아마도 사랑의 싸움.. 뭐라냐... ㅋㅋ
    그리고 전역 전에 추억 되새김질하러 광주는 꼭 갈 거예요. 그러니 유월전에 꼭 가겠습니다.
    꼭 뵙겠습니다. 우리 같이 노닥노닥해요 ^^
  • 아진 2011/04/19 15:15 # 삭제 답글

    1년 전 우리가 함께 간 경기를 1년 뒤 너는 남자친구와 갔는데
    나는 그 시간에 에어로켓, 화약로켓, 열기구 따위를 제작하고 있었구나.
    이거 씁쓸함을 감출 길이 없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유달 2011/04/19 17:27 #

    그 로켓포 잠실에서 함께 쏘아올리지 않으시렵니까
  • 한량 2011/04/19 20:37 #

    1년 전 우리가 함께 갔을 때도.. 그리고 1년 뒤 달이랑 함께 갔을 때도... 롯데는 졌구만.
    ㅋㅋㅋㅋㅋ 근데 므찌다! 로켓도 만들어? 정말 능력자다.. 홍홍
    우리 오월에 꼭 만나요 둘쨋주 주말 어떠신가요?
  • 한량 2011/04/19 20:41 #

    유달이
    니 댓글 진심으로 단 거 다 안다.
    쓰레기통으로 화염병 아니 화염통 만드는 거 농담만은 아닌 것도 안다.
    내가 다 안다..... 토닥토닥
  • 유달 2011/04/21 14:04 #

    꽃꼬야 둘째주말 니 제주도 가잖아 ㅋㅋ
  • 한량 2011/04/22 19:29 #

    제주도는 첫째주 ㅋㅋ 깨알같네 진촤
  • 유달 2011/04/19 17:52 # 답글

    그리고 잊지말아야 할 것은 조윤석 형님도 야구장에 들어가는 순간 평범한 사직아재로 변한다는 것.
  • 한량 2011/04/19 20:40 #

    그래, 윤석이 오빠야도 남자였다. 부산남자.. 아아.. 오빠야......
  • 하다 2011/04/19 23:03 #

    앗 폴님 만나셨나요? ㅋㅋㅋㅋㅋ
  • 유달 2011/04/21 14:03 #

    아 ㅋ 못만났고요 만났어도 야구모자 쓰고 얼굴 벌개가지고 야구모자 눌러쓰면 못알아볼듯.. 어느 기사에 루시드폴도 조국 교수도 사직야구장 들어가는 순간 평범한 사직아재로 변한다고..
  • 강냉 2011/04/21 05:57 # 삭제 답글

    아아
    아침부터 기분 좋은 글을 읽고 입꼬리 씰룩씰룩 웃고 있네
    왜이렇게 예쁜거야
  • 유달 2011/04/21 14:03 #

    감사합니다
  • 한량 2011/04/22 10:22 # 답글

    헤이 강냉! 이렇게 유니크한 닉넴이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거야.
    레알 리얼리티 돋네...
    꽃구경 (사람구경 허나 이제는 님 구경)은 잘 하셨나요? 비가 오니 꽃이 지겠구나..

    그리고 유달이는 여기서 왜 감사합니다 하고 있농 ㅋㅋ
  • 유달 2011/04/22 15:28 #

    너 예쁘다고 해서 ㅎㅎ
  • 분홍곰 2011/04/23 17:07 # 답글

    와, 글도 사진도 마음도 너무 예뻐요 ^_^
    안녕하세요? 기억하실런지. 지난번에 그림으로 도장파라고 했던(ㅋㅋ) 사람이에요! 히히
    여전히 예쁘게 지내고 계셔서 마음이 따듯해지길래, 괜히 말 걸어보아요 :)
    봄이 가득하네요~ 행복한 주말보내세요!
  • 한량 2011/05/04 09:35 #

    도장! ㅋㅋ
    달이는 그림보다 살이 조금 올랐다가 지금은 다시 쪼옥 빠져서
    다시 그림의 얼굴이 되었어요. 게다가 꽤 길었던 머리도 지난 주말 샤악샥샥 잘라서 다시금 후투티가..

    ㅋㅋㅋ
  • 김명랑 2011/04/25 12:56 # 삭제 답글

    롯빠가 요기잉네? 양승호9!
  • 한량 2011/05/04 09:34 #

    ... 명랑!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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