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日記 다락방

저녁으로 가볍게 배를 채우고 가방을 꾸린다. 꾸린다라는 표현도 과하다. 비닐백에 몇 가지 세면도구를 챙겨넣은 뒤 휘리릭 자전거로 당도한 곳은 동네 목욕탕. 너무 작은 것도 아니고 휘황찬란 큰 것도 아닌 딱 적당한 크기의 목욕탕이다. 계속 생겨나는 거대 찜질방의 눈으로 보면야 더없이 소박할테지만 내게는 딱 알맞다. 나는 카운터에 오천원을 내고 수건 두 장을 받는다. 머리를 질끈 묶고, 귀걸이와 피어싱도 빼놓고 (귓볼 부분이 아닌 두 개는 결국 빼지 못했다.) 모든 걸 훌훌 벗어버리고.. 하아, 유리문을 밀고 들어선다.

찬물에 적신 수건을 머리에 두르니 이럇사이마세! 단전에 힘을 주고 힘껏 외쳐야 할 것만 같다. 돈코츠 라멘이라도 말아야 할 것 같다. 생면과 차슈대신 나는 나를 만다. 더운 탕에 잠겨 물결에 일렁거리는 나의 몸을 본다. 순두부마냥 흐물흐물하다. 이것은 빛의 굴절 탓이겠지. 탓이겠지. 그래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고. 어깨까지 담근 탓에 숨이 답답하기도, 얼굴에 열이 오르기도 한다. 이럴 때 백석이라면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중략)/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 크고 정하다는 갈매나무를 볼 테지만. 나는 고개를 들어 유유히 사람들을 본다. 엄밀히 말하자면 헐벗은 몸을 관찰하는 것이겠지만 이것은 음란한 것을 보는 것과 거리가 멀다.

목욕하는 여인들의 몸을 바라보는 기분은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 어렵다. 이것은 세상에 넘쳐나는 벗은 몸들과 다르다. 그런 몸들에 느껴지는 긴장과 강박이 이곳엔 없다. 할머니들은 엉덩이를 늘어뜨리고 앉아 굽은 등에 물을 끼얹는다. 아줌마들의 배에는 아이를 담았던 기억이 있다. 주름진 그 배에 소금을 문지르며 사우나를 견디기도 한다. 아가씨들은 강판에 간 오이나 요거트를 얼굴에 바르며 그들의 냄새를 풍긴다. 아이들은 냉탕에서 수영을 하고, 더 작은 아이들은 울기도 한다. 그러면 어디선가 열심히 (대부분의 아줌마들은 항상 열심의 자세로 때를 민다. 스피노자가 여탕에 와봤다면 사과나무 대신 다른 비유를 들었을 것이다.) 몸을 씻던 엄마가 달려와 달래기도, 혼내기도 한다. 그리고 발라당 눕혀 등이나 엉덩이, 볼록한 배를 밀어준다. 나는 턱을 괴고 그 풍경을 바라볼 때마다 항상 어디선가 보았던 자연 다큐멘터리를 떠올린다. 한가로이 볕을 쬐는 물개나 바다표범들. 두터운 몸을 이리 저리 굴리며 노곤노곤해 하는 표정. 매우 닮았다. 보는 사람도 평화에 젖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다 온몸이 빨개져 훌쩍훌쩍 우는 아이도 있다. 그것은 이십여년 전 나의 기억과 똑같이 겹쳐진다. 나는 목욕탕 가는 날만 먹을 수 있었던 삼각 커피우유의 맛을 기억한다. 온몸을 빡빡 밀어주던 엄마의 팔 힘도.

그래서 엄마는 지금도 돈을 주고 때를 밀지 않는다. 번갈아 등을 밀어줄 내가 없는데도. 늘 품앗이를 하는 것일까? 엄마의 상대는 참으로 시원할테다. 엄마는 힘이 세니까. 나도 이제 힘이 세졌지만, 대신 게을러졌다. 나는 사물함 키가 달린 고무줄을 세신 대기줄에 걸어놓는다. 탕을 오가며 흘깃흘깃 바라본다. 내 차례는 언제 될꼬, 하고. 남의 손의 몸을 맡기는 것은 약간 불편한 일이지만, 정말 '물먹은 솜'이 된 날에는 그런 신경을 쓸 겨를도 없다. 나는 높다랗고 바닥이 매끈한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몸에 힘을 빼고 있노라면 때밀이 아주머니는 싸악싹싹 손을 비비며 '이태리 타올'을 장전한다.

요렇게 눕혔다가, 이렇게 다리를 들었다가 저렇게 다리를 내렸다가 팔을 올렸다가 다시 내리고, 자반 뒤집듯 낼롬 뒤집으며 나를 한꺼풀 벗겨낸다. 약 삼십분 간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비누칠까지 끝내고, 얼굴도 살짝쿵 문질문질, 등이며 어깨, 종아리를 꾹꾹 누르는 안마를 받다보면 희미한 신음소리.. 아, 이건 아니지만 '이래서 내가 돈을 번다' 라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자족감이 차오른다. 그러다 발꿈치 각질을 (각질제거용 돌이 있다. 진짜 돌이다. 제주에선 현무암으로 된 것을 팔더라고..) 돌로 문지르는 바람에 움찔, 정신을 차린다. 세신의 마무리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떡과 포도주 없이도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자리에 돌아와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한다. 머리를 틀어올린 내가 거울에 비친다. 입가에 치약거품을 물고 있어도 발그레한 내 모습 어딘가 음, 묘하게 고혹적.. 아무렴 어떠랴, 샤워와 거울은 나르시즘과 떼놓을 수가 없으니. 게다가 이곳은 샤워와 거울, 수증기의 성지니까. 그래서 나는 머리를 꾹꾹 짜며 목욕탕을 빠져나온다. 소수점 뒤 둘째자리까지 야무지게 뜨는 전자체중계를 원망하면서.   


이글루스 가든 - 제대로 된 글 쓰기.

덧글

  • 2011/06/03 10:5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1/06/04 08:35 #

    과찬이십니다. 으핫! '일기 쓰는 것, 글 읽고 쓰는 것' 저도 좋아해요 ^^
  • 2011/06/03 11:2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1/06/04 08:35 #

    좋아요오? 느헤헤
  • 아진 2011/06/07 09:57 # 삭제 답글

    은아 우리 만나!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듣고 싶은 말도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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