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과 낮, 우리는 세헤라자데가 되어 바람은 차고 우리는 따뜻하니

작년 칠 월, 나는 처음으로 광주에 갔다. 서울에 오려던 달의 휴가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나는 다급하게 짐을 챙겨 기차를 탔다. 곧 여행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떠나기 전에 꼭 보고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지난 주 나는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광주행 기차를 탔다. 어느덧 전역이 코 앞이다.

달에게 예쁘장한 린넨셔츠에 치노팬츠를 입혀놓으니 보송보송 귀요미가 따로 없다. (갑자기 신용돋는 직장인 누나 간지를 풍기며.. 나는 카드를 내밀어 일시불이요, 했다.) 나는 튜브탑 드레스를 집어들고, 비키니를 어루만진다. 달은 비키니에 덧대어진 랩스커트를 흘깃 보고 저런 건 필요없어. 한다. 좋은 초지일관이다.. 하지만 내 허벅지는요. 네? 요 근래 도시락 일상으로 푸성귀 입맛이 되었는데, 그랬었는데 이번 연휴동안 매일 고기를 먹었다구요. 치킨은 물론 족발도 잡고 뜯었다지. 

돗자리를 달랑달랑 메고 시립미술관엘 간다. 커다란 화폭의 수묵화를 보고 있자니 눈이 다 시원하더라. 나의 조그만 마음으로는 붓 들기 전의 큰 여백과 마주하는 마음이 잘 상상되지 않아. 그건 정말 '공포를 기다리는 흰 종이들아' 같아. 미술관 계단 옆의 소파에 앉아 잠시 쉬자니 유서깊은 풍류가 둥실둥실 나를 밀어부친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고'. 그래서 우린 건물을 빠져나와 미술관 벽 그늘 밑에 눕는다. 누웠으니 자야지. 후끈하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나란히 신발을 벗어두고 야무지게 팔베개도 했겠다. 눈 감으니 그저 잠이 온다. 동네 애들 공놀이하는 소리에 깨기 전까지 꽤 달게 잤다. 풀밭 위에선 역시 낮잠이다. 아마 나는 침도 조금 흘린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내 친구를 만나러 간다. 셋이서 보는 것은 처음. 지난날 이태원에서 보고 이젠 광주에서 본다. 셋이 쪼르르 앉아 팥빙수를 떠먹다가, 무릎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서울, 광주, 거제, 인도, 이글루스를 아우르는 인연이다. 빨간 실로 엮는다면 제법 실뜨기 할 수 있을 스케일이다. 아, 정말 대단한지고. 착하게 살아야 하는거다. 착하게 사는 게 어려우면 적어도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아야 하는거다. 런던을 담은 책을 건넸더니 인도의 차와, 립밤이 돌아온다. 달리는 모자 안에서 책장 앞에 쪽지를 쓰느라 남자중학생 글씨가 되었다. 그 쪽지의 마지막은 '우리 사이좋게 지내요.' 였다. 말 그대로 이번 만남에서 동갑내기 우리 셋은 말도 놓고 그야말로 사이좋게 지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 사이좋은 우리는 쿤스트 할레에 간다. 나는 친구의 여행담과 연애담을 살짝살짝 듣는다. 아, 재미로와. 달은 갑자기 톡 튀어나가더니 우리는 일순간 여덟명의 무리가 되어 저녁을 먹는다. 저녁을 먹고 커피와 빙수와 맥주와 크래커를 나눠먹고나니 열다섯명이 넘어간다. 고생한 후발대가 도착하자 포옹의 광경이 벌어졌다. 나는 웃었다. 다들 너무 귀여워서. 자정 무렵인데 舊 도청 앞 쿤스트 할레에서 버스킹을 본다. 박수를 친다. 사진을 찍는다. 촬영을 한다. 모자이크와 우물안개구리. 몇 곡이 지나가고 자리가 파할 무렵 우리는 안녕! 인사하고 작별한다. 서울에서 다시 만나요! 한다. 

서울에서 다시 만나기 전까지. 일 년여 간, 달은 군인 아파트에 살고 있다. 처음엔 다른 형아와 같이 살았는데, 형이 다른 부대로 가게 된 이후 혼자서 살고 있다. 중간에 새로 지었다는 독신 장교 숙소에 차출될 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잘 버텨내었다. 아파트는 작고 오래되었지만, 그래서 더욱 별장같이 느껴진다. 편하게 짐을 부려놓고 마음껏 늘어져도 좋다. 체크인이나 체크아웃은 언제나 우리 마음대로. 음악을 틀어도 좋고 치킨을 시켜도 좋다. 냉장고 속 맥주는 밤새 차게 익어간다.

그런 밤에도 잠결에 응, 응 하는 대답이 점점 잦아질 때까지, 늦은 아침 눈 떠서 생긋 웃을 때부터(모닝맥주의 덕도 있다) 우리는 종알종알 이야기한다. 해가 잘 드는 환한 방에 누워 불어오는 바람을 이마에 올려두고 내가 한 꾸러미, 네가 한 꾸러미 이야기를 풀어간다. 짧은 낮잠을 자고 두시 무렵인가 일어나 우리는 집 밖으로 한 발 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해가 뉘엿뉘엿 하도록 이야기했다. 최근에 읽은 책부터 예전에 읽었던 책까지. 주변에서 보고 듣고 하며 느낀 것에 내가 겪는 일들과 생각들을 겹쳐가며 이야기한다. 리한나에서 들국화도 지나 비틀즈까지, 건너방 아이튠즈는 길고 긴 재생목록들을 물어다줬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우리가 조금씩 자란 걸 동시에 느낀다.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예전과 다르게 문제를 풀어나간다. 같은 소재로 이야기해도 다른 폭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그것이 더없이 신기하다. 우리는 한때 어리석어서,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 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내가 이것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오만이기도 했다. 그런 시간이 흘러 우리가 만났다. 이 연애는 알게 모르게 슬금슬금 우리를 바꿔놓았다. 설렘이 슬슬 꺼져갈 수도 있는데 우리는 새롭게 달아오른다. 비슷하면서 다른 생각이 교차하고 서로의 시야를 나누는 일은 몹시 흥분된다. 나는 기꺼이 너에게 세헤라자데가 되어주고 싶다. 아마 너도 그럴테지. 그래서 우리가 함께 할 밤과 낮들은 상대적으로 펼쳐진다. 천 일의 밤이 넘어도 꺼지지 않기를. 이국의 양탄자를 타고 날아올라 온 세상 모든 곳을 함께 보고 나누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글루스 가든 - 하루에 한장. 사진 일기를 쓰자!

덧글

  • 2011/06/09 01:4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1/06/10 11:54 #

    저 역시 님을 보면서 비슷한 기분을 느껴요. 부럽고 예뻐보이고 나중에 나도 그런 신혼을 살고 싶다..
    이런 마음? 갑자기 고백하려니 수줍네요. ㅎㅎ 이제 슬슬 여름이죠? 맥주의 계절이 도래했습니다..!
  • 유달 2011/06/17 19:02 #

    오오 비공개라서 보이진 않지만 이분이 그분이구나 안녕하세요 저도 어떤 신혼인지 구경하고 싶으어요 하하
  • 2011/06/09 09:5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1/06/10 11:51 #

    나 이거 읽고 웃음 쾅 ㅋㅋㅋㅋㅋ 아이참 올챙이가 뭐야 그리고 올챙이란 단어 자체가 너무 오랜만에
    듣는 귀요미 단어다 ㅋㅋㅋ 순수 우리말들이 이래서 좋아 히히
    장마와 함께 북상하려나 너는? 육호선에 또아리를 틀고 다함께 어화둥둥 서울에서 보자꾸나.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