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를 걷다 빛을먹고사라져버린

도시를 옮겨 왔으나 갈 길이 멀었다. 남은 날이 많다는 건 적당히 배불러 흡족한 기분이었다. 느긋하고 나른했다. 좁은 도시를 천천히 걸었다. 살얼음이 낀 샹그리아에 책을 끼고서 오리엔테에 자리를 폈다. 함께 책장을 넘기며 좋아하는 대목을 읊었다. 달과 책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읽어내려가는 속도가 같아서 호흡이 척척 맞는다. 잔디에 누워 얄팍하게 기대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졌다. 어둠을 등에 얹은 사람들이 서서히 걸어오고 있었다. 관 같은 것을 든 사람들 뒤로 추도하는 사람들이 따랐다. 하얗게 머리가 센 할머니들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넘어가고 우린 다시 광장을 빠져나와 거리로 접어들었다. 뮤세오 델 하몽을 엿보니 떠들썩하니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슬쩍 자리를 내어준 아저씨들에게 인사를 하고 하몽을 끼운 샌드위치와 맥주를 마셨다. 바텐더 아저씨들은 쉴 새 없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특히 맥주를 따르는 모습이 인상적이라 우리의 눈은 번쩍였다. 그 바쁨 가운데 손님들의 주문에 메뉴와 합계를 정확히 기억하는 것도 신기했다. 

떠나기 전날 밤, 며칠 간 펼쳤던 짐을 꾸려야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빳빳하게 잘도 마른 빨래들을 걷고, 여기저기 편한 대로 흩어놓은 잡동사니들을 챙겼다. 각종 어댑터부터 이곳 저곳의 입장권들, 손톱깎이까지. 달은 한참의 방황 끝에 쓰레기통에서 디카 메모리를 찾아내고 몹시 기뻐했다. 각자의 캐리어를 젖혀놓고 두서없이 짐을 꾸리는 한밤. 우리의 이야기는 일년 전을 더듬었다. 몇 번을 자지러지게 웃었던 것은 크라잉넛 15주년 표류기 앵콜 공연 이야기. 그때 나는 물처럼 맥주를 들이키며 방방 뛰었다. 꿈벅꿈벅 이어지는 기억에다 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입히니 시트콤이 따로 없었다. 공원에서 잠든 것도, 모기 물렸다고 짜증 부렸다는 것도 난 모르겠는데. 달은 머리를 괴어준 채 손을 내저으며 모기를 쫓아주었단다. 머릿 속으론 끊임없이 막차 걱정을 하면서. 아.. 가여운지고. 그렇게 작년 여름 부천 어드메를 더듬으며 깔깔거리는 사이 나는 짐 싸기를 끝냈다. 다 끝났다! 나의 외침에 황망해하던 달. 뭐야! 나는 이야기한다고 반도 못 쌌는데! 하며 못내 억울해했다. 아마 두 시 가까이 되었을거다.  
 
일찌감치 일어나 집을 나왔다. 체크아웃대신 문을 잠그고 열쇠는 부엌 창으로 던져넣으라는 지령. 야무지게 휙 던져넣고서 우린 공항 버스 타는 곳으로 향했다. 스페인 우표가 붙은 마지막 두 장의 엽서를 부쳐야 하는데, 하며 나는 줄곧 거리를 훑으며 우체통을 찾았다. 그리 흔하게 보이던 노란 우체통은 보이지 않고. 버스 타는 곳에 도착하자 웃음이 났다. 중앙 우체국 앞이라서. 아니, 그런데 우체통이 없다. 없다! 건물 벽을 따라 돌면서 찾아봐도 없기에 운에 맡기기로 했다. 닫힌 유리문 틈 사이로 엽서 두 장을 던져넣었다. 엽서들은 멀리 날아가지도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제일 먼저 출근하는 분이 선행을 베풀어주길 바라며 공항으로 향했다. (그 엽서들은 무사히 도착 ^^) 커피에 어젯밤 사놓은 샌드위치를 우물우물 씹고서 수속을 밟았다. Hola! 가 익숙해질만 하니 떠난다. 우리는 부엘링을 타고 로마로 향했다.    

이글루스 가든 - 이뉴이트의 사진동아리

덧글

  • 2011/09/08 22:0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1/09/12 21:09 #

    박스 ㅋㅋㅋ 덕분에 노숙자 간지가 좌르르..
    아 가을이 성큼오니 여름이 여름이었나 싶고 그렇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명절 잘 보내 :D
  • 고디 2012/04/04 04:37 # 삭제 답글

    댓글 다는 건 처음이지만 블로그 포스팅들 열심히 잘 보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해요 :^)
    일면식 없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글과 사진과 생각들을 나눌 수 있다는 게 즐겁네요.

    사진들 보니 저도 저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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