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의 밤, 혜화의 밤 일상

비가 오지 않는 내내 마음 놓고 피아트를 탔다. 처음엔 여러모로 겁이 났다. 퇴근한 어느 저녁 동호대교 남단에서 달과 접선, 합정까지 달릴 때는 내내 옆구리가 죄어온다며 징징거렸다. 징징거려도 어쩔 수 없다. 엉금엉금 기어갈 수 밖에. 겨우 학교 앞에 도착해 제너럴닥터에 들렀다. 빙수는 없었지만.. (잠시 눈물 닦고) 요거트를 먹고 살아났다. 출퇴근부터 시작해 야금야금 적응 기간이 지나고 이제는 제법 달린다. 이십오키로를 이어 달리기도 했다. 달 없이 나 혼자서!
목소리와 기타, 폴을 보러 갔다. 정은이와 함께 봤던 밤 우리 둘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눈물을 쏟았다. 밤의 마로니에 공원에 앉아 지난 이야기들을 늘어놓자니 너의 아픔이 나의 슬픔이 되고 나의 피로가 너의 위로로 다가왔다. 말해 무엇할까. 십년의 시간은 우릴 이렇게 저렇게 이어주었다. 서툴게 살아낸다고 느슨해지기도 팽팽히 당겨지기도 했으나 그 끈은 놓은 적 없다. 행여 놓을까 걱정한 적도 없고. 새벽 한 시의 버스정류장에 앉아 눈물을 훔치며 손을 잡고 있으니 열여덟, 열아홉으로 걸어들어간 기분이었다. 우리는 그래왔듯이 잘 살아낼거다. 작년에 약속했듯이 팔십세 호호 할머니가 되도록 매년 학전에서 폴을 보기로 약속했다. 부디 힘내주세요, 폴. 정은이와 폴을 보러 간다는 말에 달은 못내 아쉬워했다. 작년에도 두 번의 기회를 놓쳤던 달이다. 그때는 휴가 맞추기가 어려웠었지. '봄눈'이 듣고 싶다는 달을 위해 나는 한밤의 티켓파크에 잠입해 취소표를 낚아왔다. 그리고 짜잔.  
고대하던 봄눈도 들었고, 폴의 신곡도 세 곡 듣고 왔다. '여름의 꽃'을 들으니 시를 읽는 기분이었고 '외줄타기'를 들으면서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에어컨 바람에 시린 손을 부여잡고서 가만가만 폴의 음성을 듣고 있노라니 참 행복했다. 소극장은 폴에게 편안해보였다. 오래입어 더 편안한 옷. 우리는 학교로 넘어와 (듬성듬성) 불 켜진 동네 거리를 지나, 시나브로 밝아오는 한성문고에 들렀다. 주린 달을 위한 라면 한 그릇과 나를 위한 맥주 한 캔. 한 입씩 나눠 마시니 세밑 우동 한 그릇이 생각나던 밤이었다. 차도 없겠다, 지척에 집을 앞두었겠다, 우린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싶었다. 기억을 더듬어 그 예전 연말합동생일파티를 치렀던 술집을 찾았다. 쉴 새 없이 들고 나는 학교 앞에 그 술집이 여전하단 것이 좋았고, 탐내던 구석 골방 자리에 앉을 수 있어 또 좋았고, 달달한 준벅을 마셔서 더 좋았다. 유치원생 음료수 마시고 취하냐던 달의 웃음. 오랜만에 밖에서 술 마신다 그치, 하며 여행을 떠올렸다. 아이스크림 네 개에 맥주를 끼고 돌아와 폴을 이어 들었다.   

느지막히 일어나 예배를 보고 명동에 갔다. 엄마가 전해주라던 용돈을 쥐어주자 장모님께 용돈 받았다며 달은 신났다. 영양센터에서 영양을 보충하고 나는 엄청나게 예쁜 영양센터 쇼핑백도 얻어왔다. 너무 예뻐서 벽에 걸어두고 싶었다. 영양센터라는 이름은 좋은 이름이다. 벽면에 걸린 것은 메뉴가 아닌 '차림표'였다. 왠지 톰슨가젤 大 이런 메뉴가 있을 것 같다며 영양가없는 농담에도 히히덕히히덕. 효심 충만해진 달은 백화점에서 장인 어른께 전해드릴 잠바를 샀고, 나는 그런 달이 더욱 좋아 남성정장 코너에서 눈을 반짝였다. 서울역 향하는 버스가 출발하고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나만 버스 탄 것.. 짐가방은 네 손에 있는데. 어이없는 실수로 졸지에 미아가 된 나는 서울역 환승센터에서 달을 곱게 기다렸다. 기차 시간이 다가와 플래폼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예전 생각이 났다. 플래폼에서 흘린 눈물도 족히 물통 한 병은 채울테다. 다음 휴가는 항상 오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보름달을 보진 못했으나 추석은 추석이다. 나는 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 엄마아빠한테 애교도 부리고 용돈도 턱 내밀었다. 여행에서 사 온 선물들도 꺼내고 달의 선물도 내놓았다. 아빠는 몹시 감동받은 모양. 할머니를 뵙고 돌아오는 길, 아빠는 횟집에서 반주를 걸치더니 내년에 시집갈거라고 말했다. 고모는 반색하고 엄마는 웃었다. 동생은 킥킥거렸다. 나란히 저 좋을대로 눕고 기대어 수다떠는 명절이다.
이글루스 가든 - 하루에 한장. 사진 일기를 쓰자!

덧글

  • 2011/09/13 06:1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1/09/17 00:27 #

    좋아요 좋아요! 언젠가 아주 아주 덥던 주일 오후에 이촌동까지 달렸어요.
    땀을 주룩주룩 흘려가며 동빙고 팥빙수를 영접.. 친정이 거기라 하셨죠? 생각이 나더라구요 ^^

    저희 집에선 추석 음식을 거하게 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애들 내려온다고 엄마가 뚝딱뚝딱 차린 밥상엔
    갈비에 문어숙회에 참치회에 양념게장.. 오오 ㅜㅜ (너무 바다동네 티를 내나요 ㅎㅎ)
    된장찌개에 넣은 새우 껍질을 발라내 밥 공기에 올려주시는데, 그게 엄마 마음인가 싶고.
    맛있다 맛있다 하며 그릇을 싹싹 비우는 게 김애란 님 문장처럼 새끼된 노릇인가 싶었어요.

    이상하게 어릴 땐 사뭇 무뚝뚝한 저였는데 나이 먹으니 부모님께 어리광이 늘어요.
    철없는 척 조르고 뻗대다가 잔소리 듣는 게 좋아져요. 이상하죠... 흐흐
  • Fabric 2011/09/13 10:41 # 답글

    한량님 본가가 부산이신가요 저도 그런데 ㅎㅎ 폴 콘서트는 예매를 성공할때마다 사정이 생겨 표를 취소하는 악재를 겪었기에 올해는 예매를 안했어요 그랬더니 진짜 못보게 되었네요...............?!ㅠㅠㅠ 당연한 귀결인데 왜 슬픈지, 제가 예매를 안하면 표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행운이라도 기대했었나봐요 남은 추석연휴도 즐겁게 보내세요 :)
  • 한량 2011/09/17 00:21 #

    네! 사춘기를 해운대에 빚졌지요.
    어쩜 인생에서 가장 날이 서고 예민하던 때에 바다 동네에 산 건 행운 같아요.
    지금도 저는 물가가 참 좋아요. 서울에 한강이 있어 참 다행이지요. 어느 때고 다른 빛으로 좋아요.
    연휴도 끝나고 다시 집으로 또 일상으로 돌아왔네요. 그런데 주말이네요! 하하
  • smilejd 2011/09/13 20:19 # 답글

    아~루시드폴 콘서트였군요. 금년 하반기엔 저두 소규모 콘서트 함 가봐야겠어요
  • 한량 2011/09/17 00:18 #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마음이 촉촉해졌어요. ^^
    그리고 폴은.. 운동을 하는지 몸이 점점 좋아지고 있... 하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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