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생각 쓰기

막연하던 이 생각을 글로 옮기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더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면 몹시 걱정하고 슬퍼할 분위기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혼자서 엄격한 검열의 허들을 여러번 넘어야만 했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들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허나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것은 공교롭게도 부활주일 저녁이었다.

바람의 흐름이나 구름의 움직임, 팔랑이는 잎사귀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쨍쨍하거나 흐리거나,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거나 하는 변화에 예민했다. 대기가 조성되었을 때부터 지금껏 같은 풍경의 하늘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연약한 인간인 나는 절로 하늘 너머의 거룩한 존재를 떠올렸다. 자연의 모든 것들을 창조한 어떤 존재. 인간의 사고로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존재. 그저 엎드리게 하는 어떤 존재. 우주의 역사는 길고, 인간의 삶은 더없이 짧은 것에서 신이 출발한 것이 아닐까.

그러다 생각했다. 거친 가죽옷을 입은 원시의 조상들이 해를 향해 엎드려 절하던 것과 지금 내가 느끼는 경탄과는 무엇이 다를까. 그 어떤 존재가 과연 진리인 신이 맞을 것인가. 하는 의문. 나는 문득 이것이 '진리'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내가 '배운' 신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 빠졌다. 불안은 확실히 내가 '배운' 불안이었다. 한 번 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이 두려움이 옅게 스몄다. 이런 생각 자체가 불경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경고등이 잇달아 켜졌다. 그럼에도 계속 생각했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나, 대신 천 년 전의 개성에 사는 나였다면. 내가 믿는 신은 윤회와 보시를 강조하는 신이었을테고, 나는 천국 대신 극락을 염원했을 것이다. 같은 시대에서 경도를 따라 조금만 움직여 내가 중동의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절을 하고 절기에 맞춰 금식하며 성지순례를 일생의 소원으로 삼았을 것이다. 행여 의심을 표하기라도 하면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지 모를 일. 연대나 지리를 조금 옮겨보는 것 만으로 나의 진리는 달라진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선 곳에서의 진리는 정말 진리인 것일까.

이것은 공공연히 종교를 등에 업고 국가 원수의 자리에 오른 누구를 보았을 때 느끼던 회의와 분노의 색깔과는 달랐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 아래, 그것을 가벼이 변용하여 자신에게 이롭게 이용하는 자에 대한 분노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눈 감아주는 썩은 교계에 대한 회의였다. 믿음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풍랑이 이는 마음을 다스리러 경전을 펼치면, 제물을 바치고 신의 응답을 들었던 '선택받은' 이들의 고백이 이어졌다. 믿음을 간증하는 이들의 이야기에서 내가 찾는 답은 없었다.

고대 한반도의 신화 및 건국 설화의 양태는 조금씩 다르다. 평화스러운 분위기의 남방계와 달리, 북방의 신화들은 거칠고 우악스럽다. 칼을 겨누고 피를 보고 쫓고 쫓긴다. 이는 원시 부족 사회에서 국가로 진행될 때의 사회적 상황을 담고 있다. 물자가 부족한 곳에서는 더 강한 무기와 광대한 정복, 위대한 권력에 대한 이야기들이 숭배된다. 그렇다면, 몇 천 년 전의 사막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필요했을까. 

나는 그 오래된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줄곧 남자들인 것에도 의문을 품었다. 남성으로 표상되는 신이 있고, 그가 흙을 빚어 남자를 만든다. 그리고 짝이 필요하자 갈비뼈를 빌어 여자를 만든다. 도구이자 수단으로 태어난 여자. 기원을 묻는다면 뼈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여자. 그리고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다 아는 그 이야기. 인류 최초의 강렬한 배신자로 제 소임을 다한다. 공히 반박할 수 없게 그렇게 못 박아두었다. 그렇게 지상천국에서 쫓겨난 이들이 누구를 낳고 누구를 낳고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 하여(이러기 위해 자궁이 필요했던 것일까?) 지금껏 내려온 이 거대한 이야기의 결론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다. 엄마는? 몸으로 낳아주었기는 하나 애초에 순결한, 따라서 거룩한 몸이다. 이것 역시 의문을 표할 수 없게 똑똑히 기록해두었다. 가장 낮은 자로 임하였음에도 순결한 처녀의 몸이 필요했다는 사실. 사실상 인간의 형태를 빌어 태어난 것일뿐, 신성 자체는 훼손될 수 없는 것이니 처녀의 몸이 아니라 창녀의 몸이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신의 아들은 스쳐지나간 온갖 시정잡배의 씨와 분명히 구별될지니. 이 가상의 플롯이 그가 설파한 가르침과 좀 더 통하지 않을까. 왜 그토록 처녀성을 강조해야 했을까. 처녀성을 강조해서 이로운 이들은 처녀일까, 처녀가 필요한 남자들일까.

여기까지 생각을 하면서 나는 몇 개의 허들을 허덕이며 넘는다. 그러면서도 계속 생각을 잇는다.

인디오들의 성녀는 검은 피부를 지녔고, 그에 기함한 정복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가 '보는' 성자의 그림을 떠올린다. 문자 대신 손 쉽게 전달하기 위해 그린 성자의 얼굴은 문자보다 많은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숭상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서구' 미남자의 형상. 굶주린 신도들의 절을 받는 부처는 풍만한 살집을 지녔고, 배불리 먹기 어렵던 시절의 그림 속 귀부인들은 하얗고 부연 살결을 지녔다. 지방과 탄수화물이 넘쳐나는 지금의 이상형이 마르고 가녀린 몸매이듯이,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이미지의 성자를 본다. 

고대 어느 민족의 역사서는 방대한 기록으로 기나긴 시간동안 살아남았다. 타고난 배타성에 의해 훼손되거나 변질되지 않고 '땅 끝까지' 거진 이르러 세계종교의 지위를 획득했다. 반면 미미한 기록을 지니거나 유연하게 열린 신화들은 서서히 스러져갔다. 우상이 되고 미신이 되고 옛날 이야기가 되어 선 밖으로 밀려났다. 이것이 유일신의 권능에 의한 마땅한 결말인 것일까. 그보다 그를 읽고 해석한 인간들 덕 아닐까. 오래된 경전의 구절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었다. 어느 때는 끝없는 고행으로 성자의 죽음에 가까워지고자 했고, 어느 때는 '미개한' 열등 민족들을 정복하기 위한 군대의 출사표가 되었다. 영생을 예약한다는 슬로건 아래 눈 먼 화수분도 되었다. 또 어느 때는 분수에 걸맞게 열심히 노동하라는 전언이 되기도, 현실의 고단을 잠재우는 마취제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자녀가 명문대에 입학하여, 아이비리그 나온 낙타도 통과하기 힘든 취업의 바늘귀를 무사히 지나기를. 깔고 앉은 아파트의 가격이 오르기를, 그 과정에 따라 붙는 가당찮은 세금들을 적게 내기를, 그러니까 여당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기도가 되었다. 혹은 이 고된 세상을 버텨내고 언젠가 나도 성공할 수 있기를, 그리고 고통 없는 영원한 세계에서 복락을 누리기를 바라는 기도도 되었다. 이 믿음과 기도들이 색색의 노끈 나부끼는 성황당 아래서 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지갑 속에, 베갯잇 속에 새로 받은 부적을 곱게 넣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원시의 인류들이 사냥을 앞두고 제물을 바치는 것과는 또 무엇이 다른가. 나약한 인간이 동으로 뛰고 서로 뛰어도 어찌할 수 없는 없음을 깨닫고 얌전히 엎드린다는 공통점인것을. 진짜 신이 존재하는 곳이 동인지 서인지, 어느 방향인지 인간의 깜냥으로 알 수 있을까. 

우스운 가정을 해보자. 탐라국 이전의 고대 제주 사람들이 방대한 기록의 설화를 남기고, 이것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에 강하게 스며들었고, 무엇보다 제주가 지금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유일무이한 제국이라면. 우리 모두는 밥 먹기 전, 잠들기 전, 시험을 치르기 전, 새 차에 시승하기 전, 설문대 할망의 이름을 외며 고개를 주억거릴 지도 모르는 일이다. 죽기 전 올레길 걷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며 세계 각국에서 찾아들지니, 전세계 청년들의 꿈이 '까미노 데 한라산'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과연 설문대 할망이 진짜 존재하는 신일까요? 의문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눈 흘김을 받는다면. 가여이 여겨 기도를 받아야 한다면. 정방폭포의 물세례를 받으며 회개하라 '처방'받는다면.

여기까지 쓰면서 몇 번을 읽고 읽으며 문장을 가다듬었다. 앞으로 어떻게 생각이 진전되고, 어떤 결론을 맞게 될 지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생각의 흐름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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