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여행 일상

알람 없이 눈이 떠진 아침. 시계를 보니 무려 다섯시 오십 오분. 몇 분 차이도 안 나건만, 다섯시 대의 기상이라니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 지나치게 바른 느낌이다. 물을 끓여 커피를 내리고 오렌지를 깐다. 홀로 식탁에 앉아 아침을 보낸다. 이런 하루하루가 모인 요즘. 
그 요즘의 사진을 들여다보니 죄다 동네 근처다. 이 날은 아침 일찍 밥 먹고 창덕궁 후원에 갔다. 선생님을 졸졸 따라 걸음을 옮기는 착한 학생들 되었다가, 마지막엔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나무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쉬는데 세상에나 너구리를 보았다. 너구리는 유유자적하게 어슬렁어슬렁 흙길을 지나 언덕을 넘어갔다. 우오오워어! 너구리! 청설모나 까치나 멧새나 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궁궐 관리 직원분이 우리에게 말씀해주신다. 원래는 밤에 나오는 녀석인데 신기하네요. 얘네들 영역 다툼하고, 다음날 보면 여기저기 피 칠갑되어 있고 그래요. 허어 너구리들도 살벌하구나.

달은 인고의 시간을 거쳐 머리를 기른 후, 파마를 하고 돌아왔다. 영화에서 어느 배우를 보고 그 마음을 결심했는데, 그 배우가 아역 배우라는 것은 비밀이라지. 여튼 곱슬곱슬 예쁘다. 자고 일어날 때면 머리에 솜사탕 하나를 이고 있는 듯 하다. 짜식, 귀여운지고.
밥도 먹고 술도 먹고 한다. 그와중에 노동절을 맞아 나도 파마를 했다. 따.. 라 한 것은 아니다. 섬세한 손길에 힘 입어 완성된 머리는 하루가 지나자  부스스한 덤불 스타일로 돌아갔다. 딱히 어떤 스타일을 추구하기보다, 지금이 지겨워지면 머리를 하는 듯하다. 그러니 아무래도 짧은 머리가 되기 쉽다. 구비구비 길게 기를 참을성이 없다.  
친구의 남자친구를 소개시켜주는 자리에 가는 길. 둘은 가을에 결혼하고, 살림을 꾸려 독일에 간다. 남자친구가 뮌헨 사람이기 때문에.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 물으니 아직 정하지 않았단다. 일단 이사해서 짐을 풀고 나서 여행갈 거라고. 친구들은 말했다. 제주 어때 제주. 그 농담에 다들 빵 터져 돌하르방 코를 문지르라느니, 갈아 마시느라느니 덕담이 이어졌다. 금발의 색목인과 치맥을 먹는데, 한국말을 곧잘 하여 어색할 기운이 없었다. 물론 우리끼리 약속을 잡을 때부터 빈번한 드립이 이어졌다. 독일인을 만나면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책임을 물으라느니, 불교 신자인 누구는 卍 자 펜던트 목걸이를 주의하라느니 같은 농담들. 먼저 도착한 친구는 반갑게 웃으면서 농담을 했단다. 그건 바로 나치드립...! 뒤늦게 이야기를 들은 나는 친구를 한 대 치면서 제 정신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하 참! 그러자 어깨를 문지르며 '괜찮아! 일본인들은 반성 안 해도 독일애들은 다 반성했잖아.' 한다. 나는 조용히 목소리를 낮춰 속삭여주었다. '다빗은 반성 안 했을 수도 있잖아...'  
서울 오신 엄마 아빠를 모시고서 시내 곳곳을 돈다. 남산을 걸어 오르고, 걸어 내려온 다음 날 창덕궁 후원에 갔다. 연두빛 잎들이 살랑이고, 늦은 꽃들이 활짝 활짝 핀 길을 함께 걸었다. 서울 와서 운동 많이 하고 가네, 엄마 아빠가 말한다. 엄마 아빠,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집에 와 저녁을 먹고 넷이서 집을 나선다. 동네를 한 바퀴 크게 돈다. 우리는 언덕길을 올라 삼청동에 이른다. 아빠가 커피를 사 주셨다. 카운터에 진열된 스콘도 하나 고르라 한다. 우리는 까페 이층의 테라스에 앉아 바람을 쐰다. 커피를 마신다. 농담을 많이 하고 수다를 많이 떨었다. 마감 시간입니다 소리에 엉덩이를 뗀다. 오월의 밤, 한산한 거리엔 색색의 고운 등이 반짝인다. 옛날 생각이 난다. 나는 가슴이 쿵쿵 뛴다. 달에게 안겨들고 싶다. 금슬 좋은 부부 뭐라 하시진 않겠지만, 살짝 참았다. 아빠는 책장을 주욱 관찰하시더니 <먼 북소리>를 꺼내 아주 열심히 읽으신다. 늦은 밤에도, 이른 아침에도, 안경을 이마에 올려두고 약간 인상을 찌푸린 채 책장을 넘긴다. 아빠 재밌지? 하니 재미있단다. 귀여운 아빠.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곳에 고무나무 화분이 하나 있다. 예전에 엄마가 선물해 주신 화분. 언제부터인가 시름시름 앓아 이파리들을 하나씩 떨궜다. 그래도 오래오래 버텨왔는데 이번에 부모님이 내려가시고 나서 완전히 죽었다. 잎 모두 떨군 채 말라버렸다. 우와 이거 마지막 잎새잖아! 놀란 달의 목소리. 
고무나무는 죽었으나, 영천 시장에서 업어 온 극락조는 잘 지내고 있다. 아마 주말 전의 밤 아니었을까.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으며 저리 껄껄거렸나. 아마 달이 농담을 한 모양이다. 주말 아침에는 역시 음악과 함께 커피. 화사하니 볕도 좋다. 창문을 열어두면 바람이 살랑인다. 궁궐 담 너머에서 새들이 운다. 고양이들이 가르릉거린다. 아차 하는 순간 '완연한' 봄이 되었다. 서랍에서 꺼낸 반바지가 그리 어색하지 않았으니 이러다 곧 여름일 것 같다. 어쩌지, 행거엔 아직 겨울옷이 묵묵히 걸려있는데.

덧글

  • aurora 2013/05/08 19:00 # 답글

    고즈넉하니 동네 참 좋네요. 집도 예뿌어요! :)
  • 한량 2013/05/10 20:52 #

    네 ㅎㅎ 밤 되면 온 동네가 조용하니..
    창을 열면 부엉이 우는 소리도 들려요.
    모기 없는 이 계절이 참 소중하네요. ㅎㅎ
  • 2013/05/09 13:3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5/10 20:5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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