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생각 3 쓰기

위험한 생각
위험한 생각 2

에 이어서.
지난 부활주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나와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다만 일상을 살면서도 그 생각은 머릿 속 어딘가에 눌러붙어 있다. 내가 믿어온 신이 진리로 존재하는 신인가. 영원히 절대적인 존재임이 분명한가. 이 모든 것이 지금 세계에 가장 유행하는 하나의 현상은 아닐까. 하는 것.

인본주의 :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는 사상

인간이 인간 아닌 것들을 우선으로 둘 때, 인간인 우리는 자연적으로 불편함을 느낀다. 그것은 우리가 속한 종이기 때문에. 계급, 권력, 돈과 같이 인간 사회에서 파생되었으나 인간을 억누르려는 것들이 우선 그렇다. 같은 인간 안에서도 지위, 성별, 지적 수준 등으로 차별을 둘 때도 갈등은 발생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들은 모두 한 통속이 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저항한다. 자신이 직접적으로 박해받는 대상이 아닐지라도 위기의식의 동심원은 차차 퍼져나간다. 갑과 을의 권력 구조에서 해당 회사의 을이 아님에도 우리는 불매운동을 한다. 그런 문제들에 관해 공분할 줄 아는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 이런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 볼 수 있다.

이런 생각들은 종교란 벽을 만나면 어김없이 고꾸라진다. 유일신을 따르는 종교는 필연적으로 피아를 가르고 선 너머의 이들을 배척할 수 밖에 없다. '나의' 신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나누고, 같은 믿는 자 안에서도 어떤 해석을 어떻게 내리고 따르느냐에 따라 가른다. 이것은 계급, 권력, 돈, 지위, 성별, 지적수준 같은 지표와 다르지 않게 갈등을 조장하고 사회를 분열시킨다. 더 두려운 것은, 이를 자각하기도 어렵게 만든다.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므로 자정작용이 더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정작용은 믿는 이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그들은 심심하면 일어나는 종교인들의 악행을 두둔하기 어렵다 싶으면 곧잘 신의 영역으로 넘긴다. '인간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오직 신께서 그를 판단하실 것이다. 그는 (아마도 죽어서) 죗값을 치를 것이다.' 라는 말은 종교라는 가면을 쓴 악인들을 희미하고 투박하게 뭉뚱그린다.

신의 가르침은 그게 아닌데, 타락하고 어리석인 인간들 즉 절대적인 원죄에서 잉태된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여운 사투일까. 나는 절대적이라는 말에 반감이 들었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와 절대적이라는 말은 분리할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을 강경하고 잔혹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절대적인 악, 절대적인 선이 있을까? 그 어느 인간이나 양면적인 아니, 다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종교는 이 다양성을 오직 자신들의 기준틀에 넣어 설명한다. 신과 사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천국과 지옥. 인간의 기원과 현재와 사후세계는 언제나 이분법적인 논리에 의해 정의된다. 이것을 뛰어넘는 것은 오직 믿음, 회개, 구원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라고 한다. 악인도 선인도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길을 통과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무수히 많고 많은 사람들을 구멍 하나 뚫린 체에 넣어 거르는 셈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 지금 살아있는 인간 중 사후세계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절대적이라는 말은 여기서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맞닥뜨리게 되는 절대적인 무지의 영역. 종교의 관점에서 그것은 마르지 않는 레드오션이다. 그 점에 착안해 그들은 공고한 권력을 쥔다. 종교적 계율은 신성불가침이라는 무적의 방패 아래 많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억눌러왔다.

이런 회의가 들기 전부터 나는 줄곧 불편함을 느껴왔다. 이름하여 이름모를 땅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전파하라는 전언에 대해. 칼과 총을 앞세웠던 정복자들의 후예는 좀 더 나긋나긋한 방식을 택한다. 이걸 믿으면 빵을 줄게, 이걸 믿으면 물을 줄게. 이것이 진정 선한 의도의 발현인가? 그렇다고 믿는 이들은 오직 그 종교의 신자들 뿐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한다고? 나눔과 구제를 행한다고? 좋은 말이다. 하지만 종교가 없어도 우리는 그리 할 수 있고, 그렇게 한다. 함께 연대하고 어려운 이를 돕고 베풀며 이 사회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종교 없는 사회, 종교적 색채가 다른 사회, 종교의 힘이 크지 않은 사회에서도 이미 우리는 그렇게 행해왔다. 이는 인간 내면의 도덕적 의지, 공동체를 위한 희생, 사회적 합의 등에 의한 것이지 종교의 명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인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선한 일을 덜 할 것 같은가? 종교의 지원 혹은 묵인 아래 저질러진 숱한 악한 일들은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힘을 가진 종교는 인간의 모든 것을 통제하게 된다. 물리적, 물질적인 핍박 뿐 아니라 정신과 가치관을 통제한다는 면에서 가장 끈끈한 수단이 된다. 그것이야말로 자유를 억누르는 동시에, 인간이 본래 지닌 선악에 대한 민감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더불어 이런 일들을 아름답게 포장하여 믿는 이들에게는 약자를 어루만진다는 우월감과, 값싼 위안을 준다. 원시사회에서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보다 진보적인 사회에 이르는데에 종교가 도움을 주었는가? 과연 신의 은총이 두루두루 임해서였는가?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많고 많은 예들 중 하나를 들어보자. 인간은 평등하다. 인간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이 의견에 반박할 종교인들은 드물 것이다. 그들은 이 전제를 옳다고 말하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있다고 말한다. 다만 그들의 머릿 속에서 '인간'은 '모든' 인간을 지칭하지 않는다. 역사상 가장 지속적이고 강력하게 같은 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해 온 이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온갖 저주를 퍼붓는다. 이것이 만민을 사랑하고 약자와 연대하라는 말씀의 실현인가? 동성애가 씻을 수 없는 죄악이라는 것은 누구의 생각인가? 신의 이름 아래 그들을 '계몽'해야겠다며 소리높힐 일이 아니다. 그러한 편견을 살포하며 직, 간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것이야말로 회개해야 할 일이다. '나는 이성애자이므로 그들에 대해 잘 모르겠어.'라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지지, 혹은 우려, 그리고 대부분은 제 삼의 방관자로 남는다. 모여서 성명서를 내고 집회를 열고 일간지에 광고를 게재하고 사탄 운운 하며 핏대를 올리는 것은 모두 종교의 이름으로 이뤄진다. 그것은 다분히 조직적이고, 그래서 대담무쌍하며, 노골적인 혐오를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한다. 아, 어디 그뿐이랴. 저 불쌍한 어린양을 위해 기도도 해줘야지.

결국 그들의 눈에 세상은 두 가지로 나눠진다. 무지개색의 필터는 사고 영역 바깥에 있다. 이 모든 것은 자신들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배타적인 믿음과, 그로부터 얻은 우월성에서 시작되었다. 선 밖에 있는 이들을 향해선 날 선 손가락질이나, 자기 위안을 위한 기도로 나눠진다. 그런 눈으로 믿지 않는 이들을 가여이 바라본다. 불쌍하게 여긴다. 전도와 기도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기타를 치며 노방전도를 하는 이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삼 개 국어로 외치는 이들. 환하게 번지는 득의만만한 웃음들.

나는 종교 내부의 부패하고 타락한 실상, 여기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다. 생래적인 선 긋기를 지적하고자 여기까지 왔다. 내가 속한 집단만이 옳은 것(이것이 가장 문제이다. 가장 좋은 것, 가장 세련된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유용한 것 등등의 개념과도 다르다. 옳은 것이라는 개념은 이 모두를 아울러 그 위에 올라선다.)이라는 생각, 그 너머의 것들은 그릇되었다는 생각. 그러니 고쳐주어야 한다는 생각. 아무도 원하지 않았는데요? 응, 그래도 넌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어. 같은 생각들.

인간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이 사상은 종교라는 허울 아래 위선을 두른다. 이런 종교는 낡고 오래된 권력 집단과 결탁하기 아주 쉽다. 그 둘의 기조는 너무나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 자신이 곧 권력 집단이 되어간다. 새 힘을 얻기 위함일까, 행여 밑바닥에 고인 일말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노력일까. '한 주 간에 지은 죄를 회개합니다.'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는 기도 대목이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일주일 유통기한의 주사를 맞는 셈이다. 돈을 주고 천국행 티켓을 사던 사람들의 후손들은 좀 더 세련되고 좀 더 우아한 방식으로 일주일 치의 죄를 씻는다. 그리고 다시 환한 얼굴과 힘찬 발걸음으로 전진한다. 저 속되고 악한 세상을 향해.

덧글

  • 2013/06/04 14:2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6/11 09:1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5/05/18 00:2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5/05/22 18:32 #

    안녕하세요^^
    벼룩 시장 때 반가웠어요!
    그후로 정신 없이 또 바쁘게 지내다
    이렇게 답글을 다네요.
    길게 써주신 글 찬찬히 읽었어요.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읽었어요.
    제가 종교를 가지고 있는 상태라면
    어엇! 하며 가려 읽었겠지만,
    지금 제겐 그런 색안경 자체가 없네요.^^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라고 살면서
    그 기반을 배신? 하면서 제일 갈등이 심했던건
    제 마음 속이었어요.
    마치 풍랑을 겪는 사람처럼 계속 여러 생각들이
    싸웠죠. 그 시절 제 관심사가 그것이니
    아무래도 친구들 만나서 하는 얘기도 종교 얘기가 많았어요. 나는 이런 혼란을 겪는다.. 이런.
    저와 맞장구를 치며 동감하는 친구는
    저와 같이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랐으나
    종교를 선택하지 않은 친구였구요.
    둘이 막 성토를 하는데, 다른 친구들은 옆에서
    멀뚱히 있어요. 그들의 공통점은 애초에 종교가 없는 친구들이었어요.
    종교적인 분위기가 없는 배경에서 자란 친구들이요.

    그때 저는 뭔가 깨달았어요.
    제가 발버둥치며 종교적 세계에서 탈출하려
    애쓰는 것도 일종의 전향자의 심리로구나.
    지난 세계를 부정하고 새로운 생각들을 정립하려는 노력이구나, 하는.
    멀뚱히 있던 친구들은 애초에 부정할 만한,
    즉 강요받거나 세뇌받은 적이 없기에
    종교적 문제에 초연할 수 있구나, 생각했어요.
    그들의 갈등없는 마음이 참 부러웠고..
    더불어 스스로가 좀 안쓰럽고 ㅎㅎㅎ

    그런데 지금은, 제가 그래요.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열띤 논쟁이나
    갈등을 하지 않아요.
    강 건너 불구경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나와는 상관 없는 세계가 되었어요.
    프레임 밖을 벗어나는데 그만큼의 진통이 있었던 것 같고..
    밖을 나와보니 홀가분하고 좋더군요.

    그래서 저는 지금의 평화가 마음에 듭니다.
    절대적인 선, 절대적인 신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지금이요.
    저는 누군가의 지고지순한 희생을 먹고
    자라지도 않고, 울면서 회개할 죄도 없는
    지금이 좋아요. 그냥 적당한 인간으로 사는 게 좋아요. 나를 지켜본다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지금이요.

    하지만 혜란님을 다르게 본다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각자의 선택과 생각이 있으니까요. ^^
    여행은 떠나셨을까요?
    즐거이 잘 다녀오시길 빕니다.
    저도 지금 공항 탑승구 구석에 앉아있어요. ㅎㅎ
    갑작스레 짧은 여행을 다녀오네요.
    폰으로 써서 두서없는 글,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그럼 안녕히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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