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관통한 그들 <크라잉넛 7집 리뷰> 쓰기


<말 달리자>가 대한민국 곳곳에 울려퍼질 때, 나는 꼬꼬마 초딩이었다. 그리고 <서커스 매직 유랑단>과 함께 시작된 사춘기. 귓전을 때리는 워크맨을 끼고 살면서 나는 막연히 머나먼 세계를 동경했다. 그곳은 멋진 오빠들과 언니들이 굉음의 베이스에 맞춰 발을 구르는 곳. 노랗고 빨간 머리칼이 날리고 주렁주렁 피어싱이 열린 아름다운 귓볼이 번쩍이는 곳. '갈매기'와 '펑크걸'을 들으며 나도 언젠가 진짜 사랑을 하겠다고 일기장에 끄적거리던 때. 그들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여기 가만 앉아있을 수만은 없어 몰래 무릎을 까딱거리고 어깨를 들썩였으나, 그래봤자 나는 중딩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저항이란 우리의 머리칼을 한 움큼씩 거칠게 잘라내던 선생들과 양말의 색까지 검열받던 학교에 머물러있었다. 구십칠 년, 잊을 수 없는 아이엠에프는 우리 모두의 뺨을 후려갈겼다. 다들 얼결에 얼얼해진 뺨을 만지며 고개를 돌려봐도 보이는 실체는 없었다. 보이지 않는 유령은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들었다. 어디 한 푼 낼 금가락지 하나 없는 나는 다만 일제히 취소된 수학여행이 아쉬웠을 뿐이고, 반복해 듣던 '게릴라성 집중호우'는 아련하고 구슬픈 멜로디로만 느껴졌다.

어느덧 나는 자라고 자라 연차와 연말정산에 예민해지는 나이가 되었다. 요령껏 열심히 고군분투하여 입성한 직장에서, 오욕과 모욕에 목욕하길 수차례. 영광은 짧고 회의는 길었다. 그렇게 나는 퇴근하려고 출근하고, 금요일을 위해 월요일을 맞는 사람이 되었다. 세파에 시달리고 찌들면서도 마음 한 켠엔 늘 미친 듯 발 구르는 나와, 목놓아 소리치는 내가 어른거렸다. 그럴 때 공연장을 찾으면 나는 부활의 세례를 받은 듯 다시금 싱싱해졌다. 정신줄 놓고 다들 흥겹게 뛰어놀던 그때 나는 내가 살아있다고 느꼈다. 진부한 표현이나 진심이었다. 펑크의 동력으로 새로 만들어진 따끈한 피가 혈관을 따라 온몸을 돌 때면, 나는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들을 한참 쏟았다. 오직 공연만이 나를 구원했다. 세상사 모든 껍데기를 다 벗어던진 그곳에서 나는 남자친구가 될 이를 만나게 되었고, 그는 지금 내 남편이 되었다.

새로 앨범이 나온다는 소식에 우리는 일찍부터 흥분해 있었다. 음원이 공개되었다는 말에, 목욕재계하고 가부좌 트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아, 오빠들이 돌아왔다. 나는 유월의 습한 더위가 땀이 되어 목덜미를 적시던 동네의 조그만 마을버스에 앉아있었다. 지나치게 생활의 냄새 물씬 풍기는 그 곳에서 나는 잠시 우주를 날았다. 고개 들어 보지 않아도 별은 늘 그곳에 있었다. 우리가 차곡차곡 나이를 먹어 허울좋은 '사회인'이 되었듯이 크라잉넛의 음악들도 나이를 먹었다. 허나, 연륜의 힘일까. 보다 폭 넓고 멋진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는 그 가사들 앞에서 애잔한 슬픔과 격정의 환희를 반반씩 베어물었다. 슬금슬금 모두의 발목을 적시며 흘러온 신자유주의의 늪에서 누군가는 무릎까지를 담그고, 누군가는 허리, 누군가는 가슴, 누군가는 그만 익사하고 만다. 우리는 허우적대는 이를 안쓰러이 돌아보지만, 차마 손을 뻗어 그를 잡아주기에는 주저한다. 내 한 몸 버티기에도 힘겨우니까. 자칫하면 나도 말려들지 모르니까. 발목을 휘감는 뻘 속에서 가여운 탄식만 내뱉을 뿐이다. 그 간극에 크라잉넛의 음악이 파고든다. 십 년하고도 수 년 전이었다면 감히 그들은 '난 난 돈이 필요해'라는 가사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우릴 등골 브레이커로 만드는가. 누가 우리의 애틋한 사랑을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게 하는가. 그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다, 라고 말해준다. 우리를 잠식해가는 그 늪 속에서 크라잉넛은 배를 건조해 띄워보낸다. 그들은 몸소 그 배에 올라타 부서지는 파도와 거친 바람에 맞서 항로를 개척한다. 으아아악 끼야야악 같은 위기의 순간도 닥쳐온다. 하지만 크라잉넛은 망원경을 들고 도착할 섬을 그린다. 허세와 냉소 가득한 이 세상 앞에 감히 말한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빛'을 찾는다고. 더불어 방구석에 처박힌 이들의 어깨를 일으켜준다. 혼자 있을 때 우린 작은 조각일 뿐이지만, 함께 뭉치고 연대할 때 우리는 꿈꾸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고. 이는 마케팅의 최전선에 선, 발음도 낯간지러운 히일리이잉이 아니다. 그들이 지난 시간 동안 몸으로 입증해 온 증거이며, 역사이기에 나는 애틋한 마음 안고 곡조에 빠져들 수 있다. 티비도 컴퓨터도 전화도 에어컨도 잠시 멈춘 세상, 멜로디 켜켜이 숨은 메시지는 모두의 손을 잡고 하나로 잇는다. 그 안에서 청춘남녀노소 누구나 공평한 은총을 입는다. 우리의 머리칼, 귓볼, 어깨, 허리, 가끔 저려오는 도가니에도 음표는 골고루 내려앉는다. 사방에 나리는 맥주 방울방울들이 우리의 바싹 마른 입술을 적신다. 우노 도스 뜨레스 꽈뜨로 모두 모여 우리는 친구가 된다. 앨범을 모두 듣고서 나는 말해본다. Nosotros somos companeros. 우리는 동지다, 라고.

덧글

  • 까투리 2013/06/09 20:39 # 삭제 답글

    너트는 건재합니다! ㅎㅎ 좋은 리뷰 잘읽었어요~7집 검색하면서 우연히 들어왔다가 글이 넘 좋아서 다른 포스팅을 보니, 아니 그 유명한 군바리님의 그 커플이시다니! 반가와서 댓글남깁니다!ㅎㅎ 앞으로도 주욱 행복하시길바래요 ㅎㅎ
  • 한량 2013/06/11 09:05 #

    ^^ ㅋㅋ 반갑습니다. 토요일 공연 가시나요? 너무 가까워서 실감이 안 나요.. 떨려요...
    음원 들으면서 마음 다스리고 있답니다. 내일 음반 나오죠 ㅎㅎㅎ 꺄아
  • Lynn 2013/06/11 14:08 # 삭제 답글

    너무 제마음같은 리뷰 ... ㅠ 전 이렇게 글을 잘 못써요 ..... 그래서 너무 속시원한 리뷰네요 ㅎㅎ 공유해도 괜찮을까요??
  • 한량 2013/06/11 16:43 #

    ^^ 출처 표시해서 공유해 주시면.. 제가 다 고맙지요. ㅎㅎ 토요일이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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