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 후기 <지금 아니 여기 그곳, 쿠바>

해가 살짝 들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일어났다. 간단한 아침을 먹고, 준비를 시작했다. 거실 한 켠에는 어제의 흔적들이 모여 있었다. 늦은 밤, 나는 호올로 거실에 앉아 낑낑거리며 작업을 했었다. 맥주 한 캔과 샹송을 곁에 두고서. 준비 잘 하고 있냐는 친구의 말에, 나는 이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친구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또 무엇을 가져가면 좋을까, 하는 생각에 챙긴 미니카들. 그리고 카메라. 그래도 뭔가 허전한 것 같아 선반에 놓여있던 화분까지 들고 집을 나섰다. 세종문화회관까지는 가까운 거리다. 부암동을 지나 청와대 방면으로 내려가는데 날이 더없이 좋다. 햇살은 늦여름, 바람은 초가을, 하늘 색은 완연한 가을. 좋다, 좋다, 연발하는 사이 도착했다. 세종문화회관의 뒷마당은 아늑하면서도 오밀조밀 잘 꾸며져 있다. 파란 풍선들이 부스들마다 날리고, 푸른 잎들이 색을 더한다. 입구에서 안내를 받아 배정된 부스로 향한다. 들어오는 길목과 마주한 자리, 느낌이 좋다. 이것 저것 가져오긴 했는데, 어떻게 차릴 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대강 늘어놓아 본다. 조금씩 요령이 생겨 조금 더 늘어놓아 본다.
그렇게 완성된 자리. 세종예술시장 소소에 참가한 토요일이다. 친구가 곱게 만들어 준 포스터도 붙이고, 책들을 얌전하게 놓아본다. 미니카들은 순전히 사진 받침용으로 쓰였다. 바르셀로나에서 산 바이크 아가씨만 좋은 자리에 놓였다. 시장이 본격 시작되기도 전, 오고가는 사람들이 있다. 제일 처음으로 부스를 찾아주신 분들은 엄마뻘보다 조금 더 위인 아주머니들. 어머, 이게 뭐야? 로 시작된 질문들에 나는 이런저런 설명을 했다. 여행 다녀와서 쓴 여행기로 책을 냈어요. 그곳에서 찍은 사진들이구요. 아니, 쿠바아? 하면서 책을 넘겨보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좋은 덕담을 해 주신다. 그래, 쿠바 유명하지. 왜 요즘에 티비에 나와서 나도 재밌게 봤어, 꽃보다 청춘에서 쿠바 갔잖아. 오늘 잘 팔겠네. 라고.

저, 그곳은 페루입니다. 라고 팬심 담아 정정하고 싶었지만 나는 웃으며 안녕히 가세요 했다. 그리고 다시 이것 저것의 배치를 바꿔보고 있노라니 소소 스태프 한 분이 다가온다. 어! 저도 올해 일 월에 쿠바 다녀왔어요! 하며 시작된 쿠바 이야기. 책을 넘겨보며 수다를 떤다. 갔던 도시들을 읊고, 사진을 음미하는 그분께 농도 걸어본다. 눈가가 촉촉해지시는데요? 하며. 그러는 사이 기분이 좋아진다. 긴장이 슬슬 풀리는 듯 싶다.
이윽고 많은 사람들이 시장을 다녀간다. 눈길을 주며 지나는 분들께 구경하시라고 말도 걸고, 책을 넘겨보시라고 이야기도 건넨다. 처음으로 책을 산 분은 친구에게 선물할 거라 하셨다. 책 앞 장에 이름을 써드리는데 기분이 묘했다. 사진도 챙겨가시라고 했다. 이것 저것 구경하시다 사진 세 장을 골라가신 분도 계시고, 한참동안 책을 꼼꼼히 살펴보신 아주머니도 있었다. 내게 건네는 질문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여행에 관해서도, 사진에 관해서도 제법 긴 이야기들을 했다. 아주머니는 어느새 내게 말을 놓으시고.

카메라를 들고 오신 분들은 주로 사진과 카메라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다. 지나가다 들린 듯한 아저씨 두 분은 선심 쓰듯이, 이런 건 내가 사 줘야지 하며 지갑을 여셨다. 옆에 선 아저씨는 다 읽고 나 빌려줘 하신다. 웃으며 인사하고 보낸다. 다른 부스들 구경하세요. 하며. 사진 뒤에 숨겨놓은 미니카들을 본 아이들은 이거 사달라는 눈빛을 보내고, 옆에 앉은 달이 그건 제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방향을 바꾸는 해 덕에 얼굴 여러 면에 골고루 햇살을 쬔다. 어디선가 펑펑, 하고 풍선 터지는 소리도 들리고. 시장에 모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간다.
사진도 책도 은근히 팔린다. 달이 사 온 샐러드를 뜨다가도 들러주신 분이 계시면 또 열심히 설명을 한다. 많은 분들이 쿠바 여행에 관심을 보이고, 사진들을 이리저리 고른다. 때마침 들러준 친구네 커플. 오랜 시간 책을 꼼꼼히 보셨다는 오라버니는 늘어놓은 사진만 보고도 장소를 알아맞힌다. 그러더니 가까이 와서 사진들에 관심을 보이는 분이 있으면 하나하나 사진들을 펼쳐주신다. 조용한 바람잡이랄까.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여기가 카리브해' 이렇게 속삭인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은근과 끈기의 바람잡이로다.

나와 친구는 나란히 앉아 하염없이 수다를 떨고, 사이사이 또 열심히 설명을 했다가 다시 수다를 떤다. 달과 오라버니는 다른 부스들을 둘러보러 마실을 갔다. 나한테 만 원을 받아들고서 신이 나서 구경하러 갔다. 맥주 몇 모금에 벌개진 달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만 마셔라 잔소리를 한다. 술이 문제가 아니고, 얼굴색이 문제라서.

세상은 참 좁다고, 신기한 인연을 둘이나 만났다. 다가오다 멈칫거리다 나를 보고 나지막히 말한다. 스페인? 아 그 말을 듣자 말자 나는 탄성을 지른다. 아! 언니! 사 년 전, 혼자 갔던 여행에서 만났던 언니다. 우리는 그라나다의 호스텔 옥상에서 한밤이 되어도 뜨끈한 열기를 느끼며 길고 긴 수다를 나누었었다. 작별 인사를 나누고 떠나 도착한 말라가. 호스텔 마당에서 노닥거리고 있으려니, 다시금 문이 열리며 야! 하던 언니의 모습. 사 년이 지났고, 언니의 품엔 아기가 안겨 있다. 언니는 달을 보더니 그때 말했던 남자친구? 한다. 응! 언니! 하며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세상 참 좁아, 하다가 지금 어디 살아? 난 부암동 살아. 언니가 말한다. 언니! 나는 구기동! 해서 우리는 또다시 어쩔 줄을 모른다. 옆 동네 살았네, 하면서. 어디 그 뿐이랴.

나를 보고 다가오던 한 아가씨는, 조용한 목소리로 마치 암호와도 같은 한 마디를 건넨다. 전에 잠깐 같이 일했던 분이다. 어머, 어머, 웬일이니! 하며 우리는 또 펄쩍펄쩍 뛴다. 그땐 커트 머리하고, 너무 앳된 모습이었는데 이제 완전 아가씨네요! 이런 인사들이 흩어진다. 여기 오려고 한 것도 아니고, 약속이 있어 지나다 잠시 들렀는데 나를 알아봤다고. 아,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살면서 여러번 깨닫는 것이. 진짜 착하게 살아야 한다.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인연들은 소소 시장에서 만난다. 암, 그렇고 말고.
인연은 참 놀라워서, 몇몇 분들은 조금 다정스레 다가왔다. 보통 지나는 분들이면 사진이나 책, 테이블에 붙은 포스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다가온다. 그런데 이 분들은 걸어오는 동안 내 눈을 바라보며 다가온다. 눈이 마주쳐 인사를 건넬라치면, 잠시 수줍게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금 눈을 맞추며 다가온다. 그런 분들이 하시는 말씀은 하나같이 이거였다.

블로그에서 보고 왔어요.

꺄! 나는 입이 째져라 벙글거리며 웃었다. 나지막히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묻기도 하고, 사진들 마음에 드는 것 다 집어가세요. 부추기기도 한다. 닉네임을 말해주시는 분도 계셨고, 이름 없이 다녀간다는 분들도 계셨다. 이미 다른 서점들에서 책을 구입했는데, 다시 사가시기도 했다. 오오.. 감격스러워라. 그렇게 사가신 책을 들고 다시 찾아와 사인을 요청해주시기도 했다. 그러면서 꺼내는 네임펜. 혹시 펜이 없을까봐 편의점에서 사 가지고 왔어요. 아아.. 이젠 감격도 넘어서 쇤네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쓴다. 저도 펜이 있습니다. 그렇게 거지는 아니에요. 튀어나오려는 농담도 삼갔다. 그렇게 다가와 웃으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하는 사이 정말 즐거웠다. 대전에서 오셨다는 분도 계셨고. (설마, 여기 오시려고 오신 건 아니죠? 에 예.. 그건 아니구요. 란 대답도 듣고 말았다.) 파리 여행기도 책으로 나오나요? 물어주시기도 했고. 공통의 교집합들을 꺼내 함께 신기해하기도 했다. 어쩜, 세상 진짜 좁네요! 하면서. 

헤어질 무렵이면 은근스레 거기에서 만나요. 하고 말했는데, 다들 배시시 웃으면서 가셨다. 옆에서 그 말을 들었는지 구경하시던 분이 놀란 눈을 하고서 쿠바에서요? 라고 물어와 또 웃었다. 쿠바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하면서. 저, 이 사진이 여기 부스가 맞나요? 하며 와주신 작가님께서는 달과 나의 초상화를 그려 선물로 주신다. 귀여운 배지도 함께다. 엇, 이게 뭐에요? 하고 여쭈니 친구가 메시지로 선물을 부탁했다고 한다. 아아, 이 끊이지 않는 감동의 릴레이란.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마지막 들러주신 분께 사진을 팔고 나서 우리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온몸이 녹지근하게 나른한 만큼, 좋은 기분이 가득했다. 어둔 밤 자하문 터널을 지나 집으로 와 짐을 내려놓고서 저녁을 먹었다. 난생 처음 해 본 경험이다. 이런 시장에 나가 많은 분들을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들러주신 분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오래 남는다. 그 생글생글한 얼굴들도. 조만간 좋은 자리를 마련해 다들 모시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달고 긴 잠이었다.

덧글

  • 2014/09/17 22:42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4/09/18 22:14 #

    ^^아.. 지금 한참 매일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계시겠네요!
    와... 대단하셔요. 축하드려요 ^^
    정말 날씨가 며칠 새 많이 선선해졌죠? 아침에 일어나면 추워서
    수면양말 주섬주섬 신고 가디건 걸쳐야 좀 살 것 같아요. 으으..
    알로하님도 감기 조심! 건강 조심! 하시구요. 아기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만나요.. ㅎㅎ
  • 2014/09/17 23:0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9/18 22:1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09/18 10:2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4/09/18 22:19 #

    그때쯤 해가 나서 안 그래도 목 마르고 그랬는데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어요!!
    커피 맛있었어요. 히히 감사합니다.
    남자친구분이랑 아주 잘 어울리시던걸요? ㅎㅎ
    연애하는 아가씨들 보면 기분이 다 좋아요. 흐뭇해.. 엄마 미소...
    우리도 그럴 때가 있었지... 하며 추억에 젖어요.
    지금은 마냥 설레기엔 둘 사이 생활의 냄새가 나서요. ㅋㅋㅋㅋ

    다음 주말에 집에서 파티! 하려고 하거든요.
    야금야금 준비를 하고 있어요. 회사에서 짬짬이, 퇴근하고 짬짬이.
    별 건 없고 그냥 노는거죠 뭐 ㅋㅋㅋㅋㅋ
    혹시 시간되시면 놀러오세용 ^________^
  • 2014/09/18 13:2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9/18 22:2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09/30 14:35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4/10/03 07:20 #

    암호 ㅋㅋㅋㅋㅋ
    난 처음에 그거 듣고 응? 으응? 하다가
    얼굴 보고서야 팔짝팔짝 뛰었어요 ㅋㅋ
    그때 마침 친구가 부스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제 놀란 표정이 찍혔더라구요.
    내 표정이 그런 줄 처음 알았네.. 되게 추하던데
    ㅋㅋㅋㅋㅋ
    나중에 기회 되면 우리 만나요 ㅋㅋㅋ
    재미있을 거 같아 ^^ 그럼 연휴 잘 보내요!!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