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씨 일상

해가 갈 수록 날이 흐르는 속도가 빨라진다. 달의 말대로 월요일에서부터 금요일까지는 하나의 단위로 인식하게 된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서부터 다시 잠들기까지의 시간이 덩어리로 흘러간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마냥 관조할 수만은 없다. 시시 때때로 해결해야 하는 어떤 일들이 툭툭 튀어오른다. 하나를 처리하고 나면, 그다음 미션이 튀어나온다. 그 옛날의 게임 화면을 보는 것 같다. 나는 몽둥이로 코 앞에 닥친 일을 두들겨 물리친다. 잠시 숨 돌릴라 치면 또 다른 일이, 일이, 일이.

어느덧 육 년차. 나에겐 관록 아닌 관성이 붙었다. 삼 년 차쯤 나의 일기를 들여다보면, 행간 족족 푸념과 한숨이다. 정신적인 소모가 상당했다. 무릎까지 물이 고인 땅을 갈피 없이 디디는 기분이었다. 그 축축함, 그 막막함. 그래서 그랬을까. 직장 밖에서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갈구했다. 나는 어떤 한 뼘의 영토를 개척하고 싶었다. 의무와 책임 없는, 간섭과 눈치 볼 필요 없는 제멋대로의 영토. 드디어 조금 넓힌 마른 흙 위에 발 딛고 섰다 싶었던 작년. 누적된 피로가 증상으로 나타났다. 여독에서부터 시작된 피로는 계절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딱 이맘 때 부터, 겨울 내내 앓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체력보다 조금 더 내재적인 어떤 기운. 그런 것들이 다 닳은 느낌이 들었다. 피곤에 겨우면서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그래서 더욱 예민해졌다. 잠을 잘 자야 내일 덜 힘들텐데, 란 생각은 강박에 가까워졌다. 잠결에 감기는 달에게 짜증을 많이 부렸다. 잠이 깨어서도 그랬고, 잠결에도 그랬다.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밤 나는 그랬다고 한다. 서러웠을 달은 고작해야 퀸사이즈 침대 탓을 했다. 예선에는 좁은 싱글침대에서도 팔베개 잘만 하고 잤는데, 하면서. 

일 년이 지나고, 아주 최악인 상황에선 많이 벗어났다. 몸이 서른을 앓았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는 깨지 않고 푹 잠들고, 달이 슬쩍 안아도 깨지 않고 잘 잔다 한다. 어째 우리는 그런 것을 건강의 지표로 삼고 있다. 여하튼 나아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니.

다시 관성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요즘 직장에서 참 머리를 쓰지 않구나. 하고.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느슨한 리듬 속에서 그럭저럭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다시금 게임 화면을 떠올린다.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수행. 그러면서 실수 없이, 자책 없이, 무난하게. 가장 흔한 날씨 예보 문구 같기도 하다. '가끔 흐리나 대체적으로 맑음'. 그래서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가 한 덩어리로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케줄로 빼곡히 들어선 회사 달력 앞에서 더이상 한숨 쉬지 않는 육 년차. 어엿해서 서글픈 육 년차.      

그러나 출퇴근 길에선 살짝 긴장 상태가 된다. 아직 꼬리가 긴 초보 운전자이므로. 일찌감치 집을 나선다. 매일 다니는 길이지만 네비게이션 앱을 켠다. 몇 개 없는 목록에서 목적지를 선택하고, 블루투스로 음악을 튼다. 후진 기어를 넣고 차를 살살 뺀다. 그리고 시작되는 급경사 내리막길. 긴장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한산한 도로 위에서 엑셀을 밟을 때면 가끔 멜로디가 귀를 스친다. 매일 꼬박 다니는 길인데도 이제야 슬슬 길가와 도로 사정이 눈에 들어오는 그런 상태다. 가끔, 아주 가끔, 새로운 길로 접어들 때가 있다. 이미 아는 길이지만, 운전해서는 처음 가는 길. 아까도 그랬다. 종로에서 낙원 상가로 접어들었다. 어두운 상가를 빠져나와 운현궁을 지나는데, 잠깐 마음이 뭉클해졌다. 우리가 발 붙이고 살던 옛동네. 헌법재판소를 지나 왼편 언덕길로 접어들었다. 높다란 언덕을 올라 경복궁 담벼락 앞에서 청와대 쪽으로 틀었다. 살짝 경사진 그 길에선 오늘도 경찰들이 검문을 하고 있다. 앞에 선 차들이 천천히 빠져나가는 통에 나는 섰다 가다를 반복했다. 더불어 긴장한 차는 다소 과한 소리를 내고 있다.  에디뜨 삐아프의 구성진 목청도 묻을 만한 소리다. 앞 창으로 얼굴을 확인하고 손짓해 보내던 경찰이 뒤를 보더니 손짓을 한다. 기어를 바꾸던 나는 다시 멈춰선다. 뒤 편에 섰던 앳된 경찰이 다가온다. 나는 슬쩍 창을 내린다. 어디가시나요? 구기동이요. 대답하는 짧은 순간, 차 뒷좌석을 훑는 눈길을 본다. 당연히 내 뒷좌석은 텅 비어있다. 어떤 것도 숨겨두지 않았다. 폭발물이나, 화염병이나, 박해와 고통받는 그 누구도. 아무래도 과하게 우렁찬 시동 소리가 문제였던걸까. 청와대 지척에서 함부로 으르렁대는 불순하고 불온한 기운을 감지한 걸까. 나는 묻지 않은 말을 덧붙인다. 아, 이게 수동이라서요. 경찰은 웃는 얼굴로 나를 보내준다. 나는 다시 한번 으르렁거리며 엑셀을 밟았다. 이윽고 부암동을 오르고 내려가 동네로 접어든다. 

굵직한 단위로 스치는 날들 속에서, 조금 조금씩 꾀하던 것들이 힘이 되어준다. 기를 쓰고 놀려고 애썼던 그때, 함께 하던 친구들이 그렇고. 매몰되지 않고 버티려고 붙잡았던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로 다가온다. 거기에 어우러진 상상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시간을 쪼개 집을 치우고 꾸민다. 둘이 사는 집엔 과하다 싶을만큼의 의자를 준비하고, 커다랗게 뽑은 사진들로 액자를 만든다. 몇 달간 금주령이 닥쳐도 아쉬운 소리 안 할 만큼의 알콜을 쟁여둔다. 그렇다. 이런 것들은 무엇보다 재미가 있다. 서른살 직장인이 '재미'란 단어를 떠올린다. 그리고 혼자 웃는다. 그럴 때면 이 시간들이 뭉텅이로 흘러간다 느껴지지 않는다. 여러 번 들여다 본 주말 날씨 예보에선 해 그림이 떠있다. 가끔 흐리나 대체적으로 맑음, 이 아닌 그저 흐드러지게 쨍쨍한 날씨. 그럼, 우린 다 같이 건배를 할 테다. 쨍쨍 빛나는 소리를 내면서.

덧글

  • 슈아 2014/09/24 23:01 # 답글

    저도 7년차 직장인으로 읽으면서 공감도 많이 느꼈어요. 건강이 좋아지셨다니 다행이예요. 화이팅하세요^^!!
  • 한량 2014/09/26 08:17 #

    네! 저보다 선배님이시네요. 진짜 근속 연수를 꼽아보면 나의 한시절이 이렇게 가는구나 싶어요.
    일주일은 주말 중심으로 돌고, 한 달은 월급 기준으로 돌고, 일 년은 휴가를 두고 가네요.
    일교차가 큰데, 건강 조심하세요 ^^!
  • 2014/09/25 18:51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4/09/26 08:22 #

    저는 삼 년차 때 훅 오더라구요.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요. ㅎㅎㅎ
    더불어 삼 년을 꽉 채우고 나니 누가 말 안 해도 느껴졌어요.
    아 이제 못 그만두겠구나. 어디에 매인 느낌이 났어요.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매인 느낌이요.
    용기가 없어진 걸 수도 있고, 월급에 길들여진 걸 수도 있고요.
    그냥 거창하지 않더라도 회사 밖에서의 시간을 잘 즐기세요. ^^
    저도 뭘 그리 조금씩 두드리고 다닌 것 같아요.
    동기들과 농담으로, 엄마가 학원 보내줄 때 잘 다닐 걸 그랬어. 하면서요. ㅎㅎㅎ
    시월엔 운동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생각은 하고 있는데..
    잘 될 지 모르겠네요.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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