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이 일상

수요일 오후부터 연휴가 시작되었다. 만개한 햇살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요일 감각 없이 며칠을 보내리라. 알람도 하나 안 맞추고 지내리라.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목 마르면 마시며 보낼테다. 아무런 계획이 없어 더욱 들뜬 오후였다. 언제라도 볕이 좋으니, 이불 커버들을 꺼내 빨고 수건들을 삶았다. 이건 거의 고유한 취미에 이르렀다. 볕이 제일 좋은 오후엔 캠핑 의자 하나 들고 나가 책을 읽었다. 세수도 했나 안 했나 가물거리는 얼굴은 썬글라스로 가리고서.

작정한 것은 아니었는데, 몇 권의 책을 내리 읽었다. 오랜만에 책장 앞에 서서 무엇을 읽을까 고심하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꺼냈다. 처음 읽던 때에 줄 쳐놓았던 연필자국을 따라 책장을 넘겼다. 그때, 나의 감수성이 지금보다 풍성했음이 느껴졌다. 그렇다. 때는 이천십 년. 스물여섯의 봄. 달을 만난 지 한 달 즈음 되었을 때니, 말해 무엇하랴. 온 세상이 황홀한 꿈결이어서, 소설 속에서 만난 시름과 절망은 더욱 자극적이었다. 그 책을 다시금 읽다 마음이 조금 어려워졌으나, 끝까지 장을 넘겼다. 연휴를 그렇게 열었다. 

손님이 오는 저녁를 위해 비프 스튜를 끓였다. 매쉬포테이토와 샐러드, 숏파스타를 곁들인 저녁이었다. 손님이 들고 온 와인을 넙죽넙죽 비운 건 나와 달이었다. 오디오 음색이 따뜻하고 좋네요. 하며 건네온 칭찬 앞에서, 그렇게 진지해질 필요는 없었는데, 그만 그래버렸다. 지금 온 세계가 클래식으로 달뜬 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기대할 수 있는 전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럴 때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도는 옛날 것을 짚는 거니까요. 그것도 시대를 지나서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실패할 확률이 없는 것들로요. 세상이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없으니까, 옛날 것들 중에서 좋았던 것을 찾는거죠. 실제로 내가 물려받아서, 혹은 아껴고 간직해와서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게 클래식이라더라. 라고 듣고선 클래식 풍의 무엇을 갈구하는거죠. 진짜 클래식을 누릴 돈은 없으니. 

잠깐 공기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목으로 넘어가는 와인 덕에, 그리고 세련되게 넘어가는 손님 덕에 분위기가 다시 따끈해졌다. 나는 어딘가, 물 양동이 같은 곳에 한 발을 담근 느낌이 들었다. 저, 그렇게 비관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라고 말하고도 싶었지만, 정말 그러한가? 물어오면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다. 음, 아마도, 절반쯤은 그런 사람인 것 같기도 하네요. 그 '같기도'가 문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그저 같기만. 대체 무엇과 같다는 것인지. 무엇무엇인 것 같다, 라니. 결국 자신 없음의 반증일 뿐이다.  

김동률과 윤덕원의 신보를 비슷한 때에 접해, 비슷비슷한 빈도로 번갈아 들었다. 그 옛날, 조용한 공간에 틀어박혀 가사집을 읽고 또 읽고, 좋아하는 노래를 반복 재생하던 열정은 사라졌다. 나는 차 안에서, 방 안에서, 어떤 배경으로 음악들을 얹어두었다. 그리고 느낀 어떤 씁쓰레한 구석을 달에게 말했다. 김동률 앨범에 종종 등장하는 '청춘'이란 모티브는, 카니발의 '그땐 그랬지'의 연장선 같아. 시간이 지나 문득 예전을 떠올려봤어. 허전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해. 그래도 함께 했던 친구가 있으니, 참 좋았었지. 어설프고 쓸데없이 복잡하게 여겼던 그 시간들, 지나와 생각해보니 귀엽기만 하다. 자, 우리 건배하자! 이런 느낌. 김동률에게 청춘이란 어느 시절은 그리움과 추억의 대상이야. 반면, 윤덕원에게 느껴지는 것은 조금 달라. 꼭 가사가 그런 내용을 담고 있지 않더라도, 멜로디가 밝더라도, 그늘을 벗어나기 힘들지. 왜 그런가. 윤덕원이 (지금 자신을 청춘이라 생각하는지, 지나왔다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생각하는 청춘은 원죄 없이 우울하지. 내 잘못이 아닌데, 너의 잘못도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우울해. 사시사철 습한 방에서 사는 느낌이야. 물 먹는 하마를 구석구석 놓아보기도 하고, 환기도 자주 해. 그런데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렇다고 매일을 우울하게 보낼 수는 없으니, 해가 비껴드는 작은 창에 화분을 올려놓아 보기도 하고. 햇살의 소중함에 대한 짧은 글을 진지하게 썼다, 허세라고 생각해 지우기도 해. 그래도 어쩔 수 없어. 그 방은 애초에 습한 방인걸. 나는 그곳에 살아야 하는 걸.

습기에 관해 생각했기 때문일까. 다음 책은 <비행운>이었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우리에게 이 문장을 넘을 서사가 있을까. 작고 매끈한 소설집 안에는 온갖 종류의 물기가 번져있다. 이름도 모를 벌레들이 기어나오는 습한 공사지대, 바람이 잘 들지 않는 좁은 자취방, 결코 원하지 않는 상황인데 그럴수록 번져나오는 땀, 축축한 손, 물컹하고 터지는 양수. 그리고 아파트와 온 세계가 잠길 정도의 범람. 물 양동이 따위가 아니다. 끈끈한 늪지에 무릎까지 잠겨든 느낌이었다. 

달은 말했다. 크라잉넛을 비롯한 구십년대 펑크들 들으면 그 무모한 자신감. 세상을 다 때려부수겠다. 이리 와 나랑 한판 붙자. 라고 외치는 용기가 부러워. 나는 생각했다. 지금 우리가 나가 세상을 때려 부수자. 무엇을? 국정원을? 삼성을? 갑작스레 마드리드에서 만난 아큐파이 시위대가 생각났다. 솔 광장을 점거한 웃음. 동상에 휘감긴 설치미술에 가까운 깃발들. 밤이면 음악과 함께 손으로 쓴 종이를 들고 골목을 행진하던 사람들. 질문은 이어진다.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아니다. 부수고 나면 뭐 할건데? 뭐가 바뀌긴 해 그럼?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생긴 틈을 타 서점에 들렀다. 이번엔 무심히 집어든 책이 아니었다. 알고 디뎠다. 우석훈의 <불황 10년>. 제목부터 말하고 있지 않나.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한적한 철학 서가 앞에 쪼그려 앉아 읽다, 사서 나왔다. 까페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데, 짐작하고 있었지만 외면했던 사실들이 펼쳐진다. 우아한 비유의 세계가 아니다. 연휴의 까페, 소란한 테이블을 제치고 불안이 걸어왔다. 그림자의 선마저 매끄럽고 날카로운 불안이. 소년문학세계전집에서 <모비딕>을 읽을 때와도 같았다. 나는 빠지려는 송곳니를 혀로 지그시 밀어댔다. 유치의 뿌리가 흔들릴 때마다, 피 맛이 어렸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아릿한 피 냄새를 맡았다. 장밋빛 전망은 바라지도 않는다. 문장들은 살아남기 위한 지침과도 같았다. 그런 항목만을 나열했다면, 그가 헤집어놓은 불안을 어설피 알아 더 불안한 마음으로 끄려했겠으나. 우석훈은 그 와중에도 개인이 정신을 가다듬고 선택한 무엇이, 한 갈피나마 보다 나은 세계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한다. 그런 생각은 그가 살았던 지난 세계의 대학생들을 떠올리게 했다. 개인의 선택이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닌, 공동체의 선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는 의무감. 그런 당위들은 촌스러워, 라고 생각했던 나의 대학시절.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교만한지 이제야 깨닫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 지금 나.

우리가 본 영화는 <지미스 홀>이었다. 감독 이름 하나 믿고 갔다. 환기가 잘 되지 않았는지 텁텁한 공간에서, 몇 안 되는 관객들과 앉아 보았다. 나는 그를 잘 모르지만, 영화를 쉽게 만든다는 생각을 했다. 대충 만들었네, 이게 아니라 쉽게 슥슥 만드는 느낌. 얼기설기 복잡하게 엮지 않고 굵은 선 뚜렷한 터치. 마음의 갈등을 소심한 웅변으로 토해내는 젊은 신부를 보고는 '모리어티!'라고 외칠 뻔 했다. 총 맞고 쓰러져 누운 캐비 할배 톤으로다가. 저러다 돌변할거야, 저러다 미소 싹 죽이고 날카롭게 속삭일거야. 셜록 3x3 바스 병원의 옥상신을 떠올리며 좋아했던 것이 유일한 유쾌였다. 로만 칼라 벗어던지고 어서 예리한 악당으로 변해줘요. 하아. 지미가 마차에 실려 떠난 자리에서 그런 생각이나 했다.

연휴의 요일 잊은 어떤 밤. <미생> 단행본을 꺼냈다. 내리 읽어내려가는 나에게 달이 웹툰 <송곳>을 추천했다. 그김에 나는 침대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두 시가 넘기도록 천천히 읽어나갔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어떤 종류의 꺼리낌을 씻어내리는 느낌으로, 그렇다고 절대 개운하지는 않은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연휴에 우리가 함께 읽고, 소감을 말하는 내내 기분이 좋던 책은 <프랑스 아이처럼>이 전부였다. 이걸 읽으니 너가 왜 그랬는지 알겠어, 앞으로는 너를 더 잘 돌보아야겠어, 라며 서로를 서로의 아기 취급 하는 우리. 그 유아적인 애정놀음 이후를 과연 꿈꾸고 있을까? 언젠가는, 뭐, 아직은, 하며 미뤄온 일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자신이 없다. 내가 해내야 하는 어떤 역할, 감당해야 할 의무, 그런 고됨을 잊게 해준다는 '세상에 둘도 없는 기쁨'마저 감당할 자신이 없다. 더불어, 이런 세상에 하나의 인생을 더하게 만든다는 것이 두렵다. 미안해, 엄마는 원래 비관주의자였어. 낳아 놓고 속삭일 수는 없지 않나.

최근 본 기사 중에 기분 좋게 읽었던 것은 모 항공사의 서류전형에서 증명 사진을 제외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 외의 뉴스들은 암담했다. 딸처럼 그랬어, 는 영역을 더욱 넓혀 가족 같아서 그랬다. 까지 나아갔다. 대체 그 집안 가풍은 어떻기에 침상으로 불러내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나. 이것이 성별을 뛰어 넘어 고정관념을 타파하려는 선진 슬로건일까. 영풍문고 기독교 신간 코너에 떡하니 올라앉은 <숨바꼭질>은 또 어떻고. 두서없는 투박한 르포지만, 모두가 몰랐던, 하지만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던 기록들이 세세하다. 허위와 가식이 뺀질한 얼굴 위에서 미끄러진다. 절대자에 대한 순종, 이 신념 하에 눈을 감고 손을 치켜드는 그들. 아, 그분도 그러셨나. 딸 같아서 그랬다고. 시시각각 모든 것들이 조금씩 범위를 좁혀 모여든다. 능숙하고 얍삽하게. 때로는 몹시 당당하게. 우릴 둘러싼 그물코는 더욱 잘아지고, 빠져나갈 구멍은 보이지 않는다. 장기하의 '별일 없이 산다'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숨겨둔 어떤 속내를 들킨 기분에 슬쩍 웃으며 저 노래 참 똑똑하네, 평했겠지만. 이제는 '별일 없이 산다'가 우리의 목표가 되었다. 나 남들과 그리 다르지 않아, 나도 너희들'만큼은' 살고 있어. 우리는 별일 없이 산다고 말하기 위해 우리를 전시한다. '힐링'과 함께 어느새 남발되어 많은 이들을 질리게 만든, '소소한 일상'이란 단어처럼. 나 평범하게 살고 있어. 참 소소해. 이렇게 나 일상을 살아. 살고 있다는 것이 자랑이 되는 사회. 그 이면에서 우리는 살아내고 있다. 목 끝까지 차오른 물 속에서 발을 저으며, 아니 발버둥치며.          


덧글

  • 2014/10/14 11:4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0/17 08:3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10/15 01:37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4/10/17 08:46 #

    위로 감사해요. 월요일 아침이면 에구 에구하며 일어났는데, 벌써 금요일 오전이네요.
    아마 얼마 있으면 캐롤이 울리고, 눈도 내리겠지요?
    시간이 참 빠르다 싶고. 이렇게 하루하루가 가는구나 싶고 그래요.
    가을이라 그런걸까요. 차갑고 서늘한 바람, 쨍쨍한 볕은 참 좋은데 마음은 가볍지가 않아요.
    이렇게 따시게 몸 편히 있는게 죄책감이 들기도 해요.

    너무 충격이 커서 나름 독서일기 같은 이 포스팅에 차마 쓰지 못한 책이 있어요.
    <짐승의 시간>이라고 만화로 된 책이에요. 큰글씨성경처럼 많이 두꺼운데..
    고 김근태 의원의 남영동 사건을 그린 책이에요.
    만화임에도 장을 쉽게 넘기기 힘들었고. 읽고 나서도 후유증이 크네요.

    그래서 이렇게 위로 남겨주심에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날씨 차가운데 감기 조심하시고, 기운내셔요. 힘 내서 건강해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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