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일상

파리에서는 마이클 잭슨이나 폴 매카트니를 들었다. 정작 돌아와서는 에디뜨 삐아프를 들었다. 그쯤, 핸들을 잡고 출퇴근을 시작했다. 좁은 차 안에 초보 운전자의 긴장과 흥분, 그리고 구성진 음색이 겹쳐 떠돌았다. 그래서였을까. 운전 중 나는 종종 죽음에 대해 떠올렸다. 그것은 꽤 구체적이었다. 특히, 비가 내리는 날이나, 긴 터널 안을 달릴 때는 더욱. 점점 또렷해진 느낌 덕에 가끔은 내 옆자리에 '죽음'을 태우고 달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 내가 이렇게 집을 나서지만, 잘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지. 골똘히 집중해 생각하기에는 아직 미숙한 운전자여서, 그것은 슬쩍 슬쩍 스치는 감각에 가까웠다. 옆 차를 슬쩍 스치진 않기를 바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들은 말했다. 서울 시내에서 죽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과연 능숙한 운전자들다운 말이었다. 아무렴, 죽는 것보다 박는 것이 쉽고, 박는 것보다 스치는 것이 쉬우니. 낯선 세계의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나는 운전의 문법들을 익혀나갔다. 전기 신호들의 손짓을 따라 어느 선에서 멈추고, 어느 선에서 출발하고, 어느 선에선 회전하고. 그러나 세계는 책 속의 문법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말의 길이와 강세, 억양과 어휘들이 필요하듯 나는 잇달아 서울 도심의 문법을 배워나갔다. 아니, 그런 것은 스며든다고 해야 할까. 여기서 몇 차선을 타야 다음 코너에서 돌기 쉬운지, 늘 가장자리에 정차한 차들이 늘어선 길은 어디인지. 깜박이를 켜고선 머뭇거리지 않고 진입해야 한다든지 등을. 양보해 준 차에게는 비상등을 켜 인사를 하는 것엔 달의 습관이 묻어있다. 그러나 두세 번의 깜박임 끝에 비상등을 끄는 것은 서울의 문법이다. 약간의 틈을 보이면 금세 옆 차선의 차가 미끄러지듯 끼어드는 것도. 그래서 신호 대기중일 때도 앞 차가 조금 전진하면, 이내 바짝 붙는 것도 길에서 배웠다. 회전할 때 바닥의 점선을 지키지 않는 차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나의 문법이다. 버스에겐 언제나 양보하는 것도. 버스는 대중교통이니까. 그럼 택시는? 택시가 대중교통이냐 아니냐를 떠나, 택시에게 계속 양보하다가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카프카의 문법.

마당의 고양이 가족은 잘 지내고 있었다. 어느 주말 아침, 부산의 것보다 훨씬 시들한 갈치구이를 먹고서 남은 뼈들을 내놓아 볼까 생각했다. 지난 번 국물 우려내고 남은 멸치를 잘 먹던 기억이 나서. 갈치는 뼈가 큰데 혹시 먹다가 찔리지는 않을까? 삼키지는 않을까? 하며 들고 나갔다. 멸치 머리들만 남겨놓았던 곳에 가서, 내 생각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고양이들은 남겨둔 멸치 머리에는 아주 가느다란 뼈들이 붙어있었다. 세상에, 멸치의 뼈를 발라 먹다니. 멸치의 뼈를 본 적이 있는가? 멸치의 뼈는 큰 생선의 뼈와 같은 구조로 생겼다. 다만 큰 뼈 옆에 붙은 작은 뼈들이 손가락의 솜털처럼 잘았다. 나는 안심하고 갈치를 내려놓았다. 반나절만에 갈치는 뼈만 남기고 사라졌다. 가끔 물그릇의 물을 새 물로 갈아주고, 창 밖을 내다보곤 했다. 고양이는 조심스레 다가와 그릇에 고인 물을 마시고 사라졌다. 내가 떠다놓은 물인줄 알까? 알았으면 좋겠다. 하며, 나는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내 호의는 짝사랑과 스토킹의 경계에 놓여있었다. 늦은 밤, 집을 방문한 손님들에게 생강차를 내었다. 마당에서 마시고 싶다기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꺼내 함께 차를 마셨다. 마당을 둘러보며 좋아하는 손님들에게, 나는 고양이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거 재미있다고, 관찰하고 계속 기록해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둠 내린 마당은 고요하고 호젓했다.

다음 날, 퇴근하고 돌아와 무심코 창 밖을 보았다. 새벽부터 비가 흩뿌리던 날이었다. 나는 보통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운전해 돌아오며,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 스쳐지나간 차들에 대해 생각했다. 마당 구석의 도움닫기용 의자가 쓰러져 있었다. 캠핑 테이블에 딸린 가벼운 의자니 비바람에 쓰러졌나, 하며 스치려는데 의자 옆에 뭔가가 있다. 가만히 누워있다. 나는 창을 열고 자세히 보았다. 막내 고양이 같았다. 배가 움직이는 것 같기도, 그래서 숨 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오래토록 움직임이 없어보였다. 죽었나? 왜 죽었지?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조금 후 밖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엄마 고양이었다. 엄마 고양이는 누운 고양이 곁에 다가와 울어댔다. 창을 다시 열자, 그 소리에 엄마 고양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사라졌다. 고양이를 어떻게 해줘야 할 지 몰라서 달과 나는 망설였다. 새끼가 죽은 것을 알고 나면 엄마가 인기척 없는 곳으로 물어간다는 글을 보았다. 엄마 고양이가 데려갈 것인가.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데려가지 않으면 우리가 묻어주기로. 출근길 아침, 새끼 고양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비는 계속 내렸다. 집에 오는 길, 철물점에 들러 모종삽을 하나 샀다. 얼마에요? 물으니, 잠시 가격표를 찾던 아줌마가 천 삼백원이요. 라고 말했다. 나는 천삼백원짜리 모종삽을 사면서 비닐봉지를 달라고 했다. 가방에 그냥 넣기엔 끝이 날카로워보여서. 아줌마는 작은 비닐봉지에 담아주려다, 다시 중간 크기의 비닐봉지를 새로 뜯어 담아주었다. 주면서 고맙습니다. 라고 먼저 말한 것은 아줌마였다. 비닐봉지를 받아들며 나도 고맙습니다, 라고 했다.

골목 입구에서 달과 만나 함께 들어오는 길. 고양이는 여전히 누워있다. 잠든 것처럼. 어디에 묻어줄까. 하다 볕이 잘 드는 산에 묻어주기로 했다. 재활용품으로 내놓으려던 작은 상자에 종이를 깔고 마당으로 나갔다. 달이 고양이를 들어 상자에 담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게가 거의 안 느껴져. 달은 말했다. 여기에 들어갈까, 했던 상자에 고양이는 가뿐하게 들어갔다. 작고 가벼운 상자를 차에 싣고 전에 잠시 들렀던 공원으로 향했다. 산책로에서 떨어진, 지대가 약간 높은 곳. 소나무 밑에 묻기로 했다. 비에 젖은 땅을 모종삽으로 파기 시작했다. 잔디의 뿌리를 들추고 작고 깊게 땅을 팠다. 상자를 열어 종이에 싼 고양이를 꺼냈다. 고양이는 자는 듯 누워있었다. 모로 누워 네 발을 얌전히 뻗은 모습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몸을 벌벌 떨던 때보다 많이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누운 모습은 참 작았다. 그 위로 흙을 덮어주고, 발로 꾹꾹 다져 밟고, 소나무 아래 흩어진 솔잎들을 얹어두었다. 십자가라도 만들어줄까? 달이 물었을 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흔적 남기지 않고, 잘 썩어서 고운 흙이 되렴. 그것은 장례에 관한 나의 소망이기도 했다.

알지 못하는 길고양이가 우리집 마당에 죽어있었다면 꺼림칙했을거야. 왜 여기에서 죽었지, 어떻게 해야 하지, 꺼려했을거야. 그런데 종종 마주치고, 밥 주고, 물 주던 놈이 죽으니 마음이 그렇네.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맨날 담벼락으로 올라가려다 떨어져서 의자를 놓아주기도 했고, 그걸 타고 올라 엄마 따라 뛰어가던 모습도 보았다. 나는 일층에서, 달은 삼층에서 그 광경을 동시에 바라보며 기뻐했다. 엄마를 찾는지 배회하며 울 때, 문을 열고 나간 나를 보고는 놀라 숨던 것도 생각났다. 기껏 숨은 곳이라고 해봤자, 에어컨 실외기 밑이었다. 그 밑에 들어가려고 바둥거리던 뒷발과 꼬리를 기억한다. 강신주가 말한 2인칭의 죽음이 이것일까. 고양이는 잠시나마 우리에게 '너'로 존재했다. 잠깐 만난 '너'도 이러한데, 오래 지켜보고 시간을 나눈 '너'의 죽음은 어떠할까.

오늘 아침. 가방을 챙기던 나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엄마 고양이었다. 고양이 왔어,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달에게 말했다. 우리는 잠시 밖을 내다보았다. 엄마 고양이와, 다른 새끼 고양이 한 마리였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몸짓을 했다. 두리번거리며 찾는 눈치. 새끼 고양이는 전보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모습으로 야옹야옹 울었다. 엄마, 여기에 없어. 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엄마 고양이는 꽤 오랫동안 주변을 살펴보았다. 죽은 새끼를 찾고 있나보다. 우리가 괜히 묻어준 것은 아닐까. 어제 애틋하고 안도하는 마음으로 잠들었던 나를 잠시 질책했다. 오늘 데려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누워있던 새끼가 없어져서 놀라고 당황했나보다. 엄마는 알았을까. 새끼의 죽음을.

언제 어느 곳에서 느닷없이 죽음을 만날지라도, 단정하고 간결한 모습으로 가고 싶단 생각을 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 집착이나 미련이 없는 것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다만, 나를 '너'로 여기고 있는 이들에겐 몹시 미안하겠지만. 그럴 때가 되면, 이곳에 남긴 글들이 하나의 유서가 되지 않을까. 내 장례를 내가 치를 수는 없으니, 이건 간곡한 당부가 될 테다. 요란한 장식 없이, 인적 드문 산기슭에 잘 묻어줘. 봉분도, 비석도, 어떤 표지도 필요없어. 나는 잘 썩어서 고운 흙으로 돌아갈거야. 오랜만에 여럿 모인 자리일테니, 보사노바를 틀어놓아도 좋겠다. 무겁지 않아 좋을거야. 모인 김에 좋은 술도 함께 마시렴. 그거 사 줄 돈은 있을거야. 소란한 도시, 도처에 횡행하는 죽음들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덧글

  • 고기 2014/10/22 22:44 # 답글

    글 잘 쓰시네요..
  • 한량 2014/10/28 10:56 #

    감사합니다.. ^^
    어젯밤인가요. 또 다른 부고 소식을 듣고 마음이 또 그러네요.
    건강하셔요.
  • 보듬 2014/10/23 22:18 # 답글

    전 출퇴근하며 로드킬 당한 고양이, 강아지, 고라니 등을 며칠에 한 번은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때마다 사람이 만든, 순전히 사람을 위한 매끈한 도로 위의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돼요. 제 갈 길을 잃은 동물들의 도로 위 죽음을 생각하면 참 섧고, 사실 우리 좋으라고 만든 차디찬 도로 위에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또 한번 섧네요. 참, 뭐라는건지...
  • 한량 2014/10/28 10:57 #

    맞아요. 그런 마음이 들죠. 힘 없고 말 없는 이들을 점점 내모는 사회 같아요.
    사람이나 동물이나..
    그 후에도 엄마 고양이는 종종 만나요. 전에 뒷 다리 하나를 못 쓰고 다니다가
    조금 나은 듯 싶더니 요즘엔 아예 한 다리를 안 짚고 다니네요.
    오늘 아침 출근하는 길에 물 담아 숨겨놓았는데.. 겨울 잘 났으면 좋겠네요.
  • 2014/10/28 04:41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4/10/28 11:06 #

    엄마 하나가 새끼 넷을 어찌 다 거둘까 싶기는 했어요.
    잘 뛰고 잘 자란 애들은 안 보인지 꽤 되어서.. 벌써 독립했나? 싶기도 하다가
    어쩜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저희 집이 언덕 끝에 있어서 사람이나 차가 잘 안 오거든요.
    그래서 약한 새끼만 숨겨두고 보러 다니나 했거든요.
    말씀하신 것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엄마 고양이는 종종 보여요.
    오늘 아침 새 물로 바꿔주고 나왔어요. 저도 춥던데 고양이는 더 춥겠죠.

    안 그래도 죽은 새끼를 보면서 검색해보니 그게 불법이더라구요.
    그렇다고 생활폐기물로 버릴 수는 없으니, 야밤에 삽을 들고 첩보작전처럼 조심조심.
    인적 드문 곳에 티 안 나도록 묻는다고는 했는데. 여튼 마음이 그러네요.
    엄마 고양이가 여기 계속 들리는 것도 그렇고.

    책은, 음.. 충격이 많이 클 수도 있어서요. 저도 그랬고.
    요즘 들리는 여러 소식들도 그렇고. 각오라면 각오랄까? 책 한 권에 비장해지는 건 그렇지만.
    여튼 감기 조심하세요. 건강하시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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