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갔다. 다른 사람이 되어

제주에 갔다. 항공권 예약 사이트를 며칠 들락날락하며 표를 잡았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고심하다 최종 결정을 했다. 그간 잡아둔 표를 취소하며 내역을 살피는데 결제완료라고 뜬 일정 하나가 이상하다. 고객센터에 문의 전화를 하니 돌아오는 답은. 고객님, 그건 이천십삼 년 스케줄인데요. 아, 그렇군요. 그러고보니 딱 일 년 전, 이맘때였다. 마치고 공항으로 날아가다시피 하여 비행기를 탔고,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돌아왔었다. 체력이 바닥을 치던 때라, 여행 중 귀한 시간을 쪼개어 병원에 다녀오기도 했다. 무조건 쉬고 싶어서 숲을 찾았었다. 이천십삼년의 제주에서는 숲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일 년 사이 잘 컸다. 공항까지 운전을 해서 가기로 했다. 초보에겐 크나큰 도전이다. 내부순환로를 따라 잘 타고 가는가 싶더니, 엉뚱한 샛길로 샜다. 내리막길에 접어드는 순간 그걸 깨달았다. 그러나 어쩌랴. 길을 찾아 달릴 수 밖에. 자, 지는 해를 따라 서로 서로 가자꾸나. 자유로를 타면서는 한결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공항 근처에서 조금 헤맨 것을 빼고는 그럭저럭 잘 도착했다. 혼자 이른 저녁을 먹으며 달을 기다렸다. 달은 빛의 속도로 뛰쳐나와 공항철도 급행에 몸을 실었다고 했다. 시간을 가늠해 본 뒤에 이제 곧 내리겠네, 하고 문자를 보내니 당황스런 대답이 도착한다. 다음 역이 선유도래. 급행이라며? 급행이라고 써져서 탔는데, 급행이 아닌가봐. 그렇게 서울을 채 빠져나오지도 못한 달을 계속 기다렸다. 달은 내려 열심히 달렸고, 늦지 않게 도착했다. 비행기는 예정보다 삼십여 분 늦게 이륙했다.  

늘 시간을 확인하고, 일의 순서들을 계획하고, 그러면서 다시 시간을 확인하는 것.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내 몸은 절로 효율을 계산한다. 두 개의 알람을 맞춰두고 잔다. 여섯시와 여섯시 오분. 늘 첫번째 알람에 깬다. 일어나 두번째 알람을 끄고, 화장실을 간다. 내려와 전등과 히터를 틀고, 차 한 잔을 타서 마시며 잠을 깨운다. 잠시 후 칫솔을 물고 달을 깨운다. 가습기를 끄고, 창을 열어 환기시킨다. 양치질을 마저하고 세수도 한다.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나와 다시 달을 깨운다. 불을 켜고, 그날 입을 옷을 꺼낸다. 옷을 입고서 화장을 한다. 가방을 한 번 챙기고서 이층으로 내려간다. 커피를 준비한다. 여기에도 순서가 있다. 포트를 먼저 켜고, 원두를 갈기 시작한다. 원두가 다 갈아질 즈음, 물이 다 끓기 때문에. 그렇게 똑똑 떨어지는 커피를 두고 과일을 꺼내 씻는다. 달에게 줄 차도 탄다. 영양제 한 알을 먹고, 달의 몫도 하나 꺼내 놓는다. 내린 커피를 반 잔 정도 마시고, 나머지는 텀블러에 담는다. 월수금 요일이면, 내놓을 쓰레기들을 챙겨둔다. 종이 박스나 맥주병 같은 것들. 아침에 다 챙기기 어려우니 전날 밤에 이미 추려놓은 것들이다. 그리고 다시 가방 안을 확인한다. 가져갈 책들과 핸드폰, 지갑 등을 점검한다. 툭 튀어나오는 영수증들은 구겨서 버린다. 층이 나뉘어진 집에 살게 되면서는,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가기 전 들고 갈 것들을 챙기는 습관도 생겼다. 그러지 않으면 두 번 세 번 오르고 내려야 하기에. 빨랫감은 1층으로, 쓰고난 컵은 2층으로, 핸드폰 충전기는 3층으로. 달과 인사를 하고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집을 나선다. 쓰레기를 내어놓고, 시동을 켠다. 이 모든 것은 월화수목금 내내 이어진다. 어떤 흐트러짐도, 빠짐도 없다. 일련의 동작들은 완벽히 내면화 되었다. 어느 단계를 마치고 힐끗 시계를 보면, 예상한 대로의 시간이다. 지금은 사십오분쯤이겠지, 하면 대략 그 시간이다. 오차 범위는 오 분 내외. 아침의 십 분은 오후의 한 시간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구기동의 칸트인가.

경쟁에 부대끼다 못해 경쟁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세대처럼, 나는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 계획의 일부가 되었다. 

이렇게 떠난 여행. 돌아올 비행기는 예정되어 있고, 그렇게 돌아온 밤이면 건너뛴 주말의 의무들이 우릴 맞이할 테다. 설거지거리, 빨랫감 등등. 우선 잊자. 나는 알람 없는 아침을 기대했고, 볕을 막아줄 암막커튼에 안도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오래오래 푹 잠들고 싶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언제나 항상.

덧글

  • 2014/11/07 19:3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1/09 21:2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11/07 20:13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4/11/09 21:25 #

    언니? 언니 맞나요? ㅎㅎ
    그러게. 일에는 최대한 시간을 적게 들이고 싶고
    나머지를 유용하게 내 하고픈 것으로 채우고 싶은데.
    그것도 효율과 효용을 따지는 모습 같기도 하고.
    시간이 흐르는 것을 너무 온몸으로 체감하는 요즘이야.
    날씨가 싸늘해지니 더 그건가봐.
    여긴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마당엔 쓸지 않은 낙엽이 쌓여있어.
    아깐 널어둔 이불 위에도 낙엽이 떨어져 있더라.

    언제 한번 놀러와. 맛있는 거 먹자. ^^
  • 봉봉이 2014/11/11 17:45 # 답글

    연밸에서 뵀던거 같은데....여행기도 너무 재밋어요ㅋㅋ
  • 한량 2014/11/15 08:50 #

    감사합니다 ㅋㅋㅋ 제주 갔다고 해 놓고 출근 이야기만 잔뜩 ㅋㅋㅋ
  • 2014/11/13 01:2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1/15 08:5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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