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9 빛을먹고사라져버린

풍문으로 들어온 것보다 파리는 아름다워서, 나는 파리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한인 슈퍼에 장을 보러 몇 번, 우동을 먹으러 몇 번. 오며 가며 들렀던 동네에서 미용실을 발견했다. 머리를 좀 다듬어 볼까, 즉흥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여행지에서 머리를 바꾸는 것은 사실 오래된 소망이었다. 카오산 로드에선 노천 의자에 앉아 줄줄이 머리를 땋고 싶었다. 대로변에 놓인 의자에 손님이 앉으면, 꼬리빗을 쥔 날렵한 손들이 구획을 나눠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거리를 거닐다 밥을 먹고 술을 먹고 다시 되돌아 걷는 길에 살피면, 두어명의 사람에게 머리를 맡긴 여행자는 아직도 앉아 있었다. 사이사이 색색의 실을 꼬아 화려해진 머리. 슬몃 호기심이 일었으나, 더운 나라에서 촘촘히 땋은 머리를 감기 쉽지 않을 거란 생각에 망설였다. 그게 나에게 어울릴지는 그 다음이었다. 혼자 떠난 세비야에서, 황소같이 끙끙대며 캐리어를 끌다 마주친 미용실에서 나는 또 망설였다. 그러다 이내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걱정했고, 가난한 여행자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했다. 나는 다시 캐리어를 끌고 걸었다. 쿠바에서는 낡고 낡은 이발소를 보았을 뿐이다. 빙빙 돌아가는 간판도 없이, 가위만 그려진 이발소.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날개뼈 끝까지 긴 머리를 해 본 것도 칠 년이 넘었다. 한 번 짧게 자르고 나니, 어깨선을 넘으면 괜히 거추장스러워졌다. 머리를 자르고 나서 제일 실감이 날 때는 머리를 감을 때다. 물에 적신 머리칼은 한 줌이 안 되었다. 머리를 감고, 수건을 말고 나와 툭툭 털면 어찌나 가볍고 상쾌한지. 짧은 머리는 마르기도 잘 말라서, 드라이며 고데기며 할 줄 모르는 나는 성긴 빗으로 대충 빗어주기만 했다.
 
미용실을 점 찍어두었으나, 바로 들어가 머리를 맡기기는 저어되어 나는 말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와이파이를 잡아 켠 핸드폰으로 단발머리 검색에 몰두했다. 그리고 몇 장의 사진을 저장했다. 다음 날. 문을 열고 들어간 미용실에서 나는 어색한 인사를 하고, 대뜸 핸드폰을 꺼냈다. 머리를 자르고 싶어요. 이런 이런 모양으로. 프랑스 아주머니는 내 말을 들어주더니 조용히 말했다. 응, 그런데 너 예약해야 해. 아 네. 나는 약속한 늦은 오후에 다시 들리기로 하고, 미용실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마음이 떨렸다.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다시 찾은 미용실. 가게엔 두 명의 손님이 있었다. 잠시 앉아 기다리라는 말에 나는 샴푸 의자에 앉아, 비치된 잡지를 펼쳤다. 기사는 읽을 수 없어도 고운 화보들은 보며 장을 넘겼다. 그러면서 작은 미용실 곳곳을 관찰했다. 머리하는 의자는 세 개. 샴푸 의자는 두 개. 미용사 아줌마는 하나. 단골들이 머리 하러 오는 작은 미용실이었다. 미용사 아줌마는 한 아줌마의 드라이를 마치고 보낸 후, 다른 손님의 머리에 염색약을 발랐다. 그러면서 손님과 무어라 무어라 수다를 떨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엄마 손을 잡고 머리 하러 가던 때가 떠올랐다. 같은 아파트에 있는 어느 가정집. 그 집의 한 방엔 거울과 의자가 놓여있었다. 거기서 롯드를 만 아줌마들 머리에는 커다란 보자기가 덧씌워졌다. 엄마는 보자기를 쓴 채로 슈퍼에 다녀오기도 하고, 집에 잠시 들러 국수를 말기도 했다. 엄마에게선 파마약 냄새가 물씬 났다.

염색이 끝난 손님이 인사를 한 후 나서고, 드디어 내가 거울 앞에 앉았다. 아까 그 사진 보여줄래? 하는 말에 나는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이렇게 이렇게요. 고개를 끄덕이던 아줌마는 나를 샴푸 의자에 다시 앉혔다. 다른 사람이 머리를 감겨줄 때처럼 나는 금세 얌전해졌다. 따뜻한 물로 머리를 적시고, 샴푸 거품을 내어 머리를 골고루 문질렀다. 머리를 만지는 손길에 혼곤히 녹으면서도, 한편으로 이게 커트 과정이 맞을까 고심했다. 물어보기엔 어휘가 짧았다. 보기 보다 숱이 많네요. 늘 듣던 소리도 못 들었다. 아줌마나 나나 조용히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줌마는 수건으로 머리를 턴 뒤에 가르마를 탔다. 커다란 집게핀으로 머리 방향을 이리저리 넘겼다. 그리고 미용 가위를 들었다. 이제 머리는 내 손을 떠났다. 나는 설레는 마음 반, 걱정되는 마음 반으로 새로 꺼낸 잡지를 한 장씩 넘겼다. 이 길이 괜찮니? 물을 땐 이리 저리 집게핀으로 고정된 머리는 한 쪽만 훌쩍 짧아져 있었다. 음, 조금 더 짧게요. 나는 손으로 길이를 가늠해 보였다. 아줌마는 다시 가위를 들고 잘라내기 시작했다. 아줌마는 불어로, 나는 한국어로. 미용실에선 그렇게도 대화가 통했다. 쇄골 부분까지 길렀던 머리카락이 풀썩풀썩 바닥에 떨어졌다. 고개는 잠시 앞으로 내리라는 아줌마의 손짓에 나는 순순이 뒷목을 맡겼다. 바리깡에 짧은 머리칼이 잘리는 소리가 났다. 목 근처부터 허리까지가 간질간질했다. 

거울을 똑바로 보게끔 하고, 좌우 머리를 당겨 길이를 맞춰본다. 그리고 머리의 끝단을 점검한다. 괜찮니? 물어본다.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웨이브도 없이, 층도 없이 바짝 당겨 자른 칼단발. 갑자기 드러난 뒷목이 조금 허전하지만, 시원한 느낌이 든다. 이런 머리를 언제 해봤던가. 아마도 중학교 입학식이 아니었을까. 얼굴에 묻은 머리카락을 털고, 마지막 드라이로 남은 머리를 다듬는다. 나는 웃으며 지갑을 꺼내고, 아줌마는 노트에 숫자로 금액을 써준다. 한결 가벼워진 머리를 하고 그렇게 총총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 오후에 파리에 도착할 달을 깜짝 놀래켜 줘야지. 나는 혼자 싱글거렸다.
이건 달이 찍어준 뒷 모습. 사크레 쾨르 성당 앞에서.


덧글

  • 미로 2015/02/15 20:13 # 답글

    전 평소 드레드 헤어(밥말리 스타일)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태국 가기 전에 꽤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죠. 카오산에 가서 할것이냐 말것이냐.ㅎㅎㅎ 결국 머리 감기 엄청 힘들고 관리는 더더욱 힘들다고 해서 포기했지만 사람들이 줄줄이 앉아 머리를 땋고 있는 카오산의 풍경은 정말 진풍경인 거 같아요.
  • 2015/02/16 21:3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5/02/16 10:0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2/16 21:3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포도젤리 2015/02/16 14:54 # 답글

    타지에서 미용실이라니
    낭만이있네요
  • 한량 2015/02/16 21:38 #

    다음에도 도전해보려구요.ㅋㅋ
    파마 같은 건 영 겁이 나서 소심하게 커트만요.
    ㅎㅎㅎ
  • okno plastikowe kiel 2022/09/18 17:08 # 삭제 답글

    좋은 게시물, 더 기다리고 있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