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의 날에 부치는 소고 일상

정신 없이 바쁜 와중에, 흘깃 읽은 기사에는 로봇과 바둑왕의 대결이 펼쳐진다는 소식이 실려있었다. 바둑이라, 나는 잠시 '거북이 바둑교실'을 다니던 코흘리개 시절을 떠올렸다. 넓고 환한 공간에는 바둑판들이 정갈하게 놓여있고, 코흘리개들이 모여앉아 고심하며 수를 두는 대신, 돌을 튕기고 있었다. 벽에는 작은 초록색 아크릴판들이 걸려있었는데, 그것은 우리들의 급수였다. 선생님께 무엇을 배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나는 그쯤 열심히 바둑알 초콜릿을 사먹기 시작했다. 부록으로 딸린 종이 바둑판 위에 흰색과 검은색의 초콜릿들을 올려보기도 하면서. 짙은 남색의 학원 가방에는 거북이 등판에 바둑알이 놓인 캐릭터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엔 정직한 폰트로 학원 이름과 전화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거기에 무엇을 넣고 다녔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돌들을 넣고 다니진 않았을텐데. 그럼, 역시 바둑알 초콜릿인가.

사람들은 바둑왕을 응원하는 모양이었다. 바둑왕의 수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든다는 구글의 약삭빠름을 탄식하고, 그 노하우를 전수해 주기엔 백만 불의 상금이 적다고도 했다. 알파고라는 로봇은 무슨 생각을 하며 바둑을 두는 것일까. 생각을 하긴 하는 것일까. 나는 다시 일의 흐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사람들이 말하는 일말의 두려움이 무엇인지는 아주 잘 알 것 같았다. 이제는 엄친아를 경계하고, 사촌들과 키 재기를 하는 대신 로봇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온다니. 우리는 반드시 지고 말텐데.

서울의 동네들이 허물어지고, 새로 지어지고 하는 풍광들을 보며 자조적인 농담들을 했다. 염세주의자는 부동산에서 재미를 볼 수 없다고. 비록 깔고 앉게 되더라도, 내가 사는 이 집값이 오를 것이란 희망을 가진 자들만이 잠시나마 승리할 수 있다고. 그런 농담들은, '빅쇼트'를 보는 사이 와장창 깨졌다. 영화가 끝난 후,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달에게 말했다. 염세주의자여서 돈을 벌었구나. 내가 상상하는 점괘들로 투자한다면, 이천팔 년 월가쯤이야 껌이지. 그만큼 불안과 공포를 늘 곁에 둔 채 살고 있는데, 문제는 돈도 집도 주식계좌도 없다는 거다. 아, 그건 나도 안다.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 떨어지는 칼날은 잡지 말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무릎에서 사고 어깨에서 팔라던가? 아! 상투도 잡지 말랬지!

그래서 불안한 나는, 생리가 늦어지나라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며칠을 뒤숭숭하게 보냈다. 나는 몹시 불안해졌다. 그 덕에 뒷목과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왔다. 아니, 이건 흡사 로봇이 아닌가. 적어도 상반신만큼은 이십세기 만화 속의 깡통 로봇과 다름이 없었다. 이 딱딱한 어깨만큼이나 강하게 결심한 바가 있었기에, 그것은 한국에선 절대로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굳건한 맹약. 안개처럼 흩어진 불안이 확고한 맹약으로 발돋움하게 된 데는, 신문 기사의 덕이 컸다. 대한민국의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해로 시작해 그동안의 많고 많은 노력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는 대목이야, 흔하디 흔해빠졌으니 스크롤을 죽죽 밀어내렸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은, 그리하야 부득이하게 학제 개편까지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것은 아직 '검토'에 그치는 듯했으나, 기사를 읽는 나는 피가 거꾸로 솟다 못해, 줄줄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꼈다. 아니, 이건 흡사 생리가 아닌가. 불쾌한 통증은 차치하고라도, 뭐랄까. 국가가 이 시대의 가임기 여성들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와닿았다. 이젠 에둘러 말하거나, 좋게 포장하거나, 하다 못해 당근을 들이민다거나 하지도 않겠다는 거다.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는 거다. 학교 오래 다니고, 공부 많이 하고, 돈 벌고 그러더니 애를 안 낳더라. 공부가 다 무슨 소용이니, 애도 안 낳는데. 그러니 고만 배움을 멈추고, 진정한 어른의 세계로 들어오렴. 애도 안 낳는데, 너희가 무슨 어른이니..

그러므로 비혼의, 싱글의, 딩크의, 무자녀인 여성들의 투표권을 없애고, 여권을 빼앗고, 피임 시술을 금지하고, 피임 기구는 기본 세 자녀의 출생증명서와 등본을 지참할 시 구입할 수 있으며, 음주와 흡연을 엄격히 금지하고, 양질의 난자를 생산하도록 국가의 세심한 관리가 들어가는.. 그런 시대를 상상하고 말았다. 염세주의자의 사고는 이런 매커니즘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이러다 비혼결사체나, 딩크 아나키스트들이 생겨 마치 '더 랍스터'에서처럼 숲속을 떠돌게 될 지도 모르는, 우리의 미래. 그러나 걱정할 것은 하나 없다. 적어도 알파고의 착실한 새끼들이 있어, 바둑의 미래만큼은 밝을테니.     

덧글

  • 2016/03/10 03:4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3/10 11:2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6/03/10 11:03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6/03/10 11:32 #

    저도요. 음, 그들이 바라는대로 걸어다니는 자궁이 되고 싶지 않아요.
    동서고금 아니 동물의 세계까지도 원래 구애와 유혹이 짝짓기에 앞서는 거 아닌가요?
    더불어 안전한 환경과 긍정적인 전망이 비출 때, 아이를 낳고 싶어지는 거죠.
    이건 뭐 발정기 맞춰 가축 합사시키는 거랑 뭐가 다른가요. 후아...
    거기에 더해서 학제 개편이 더 소름끼쳤던 거는, 학업 기회의 제한을 두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였어요. 제가 겪지 않았으나, 우리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들의 한이 제 안에도 있나봐요.
    남자 형제를 위해 배움을 희생해야 했던 무수한 사례들이요.
    저희 엄마만 해도, 그리고 이모들만 해도 하나 있는 막내인 외삼촌을 위해 희생들을 했거든요.
    읏흠...

    여튼 전 무사히 생리를 시작하였고, 기쁨의 축배를 들었습니다. 슬퍼요 슬퍼...
  • 주잉야잉 2016/03/10 14:25 # 삭제 답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 자존심이 있지 ㅠㅠㅠㅠ
  • 한량 2016/03/10 14:37 #

    끼릭..끼릭.. 마이 네임 이즈 알파고오..

    문과생의 머리로는 여기까지...
    진짜 멍청이 같다 데헷
  • 말개 2016/03/10 15:17 # 삭제 답글

    꼭 탈옥합시다
  • 한량 2016/03/10 18:22 #

    하고싶은 말이 많아 여기 다 못 적겠네
    집으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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