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준 선물 일상

31일에서 1일로 넘어가는 순간은 홀로 보냈다. 11시 58분이 되었을 무렵, 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전화 인사를 나누는 사이, 새해가 되었다. 이것은 지난 금요일 밤, 내가 달에게 꺼낸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원래 환절기를 혹독하게 겪는데, 올해는 그걸 되새길 겨를도 없이 가을이 흘러갔다. 새롭게 시작한 일들에 매달려 보낸 가을. 호사스럽게 공진단을 툭툭 털어넣으며 계절을 겨우 넘겼다. 그러나 몸은 기억한다. 피로와 잠에 대한 부채는 더더욱. 12월에 이르자, 여기 저기서 삐걱거렸다. 과부하에 걸린 것은 나도 알고 달도 알았다. 나는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떠올렸다. 아무런 조건 없는 휴식. 그게 제일 절실했다. 그래서, 주말 이틀을 아무도 없는 집에서 고요하고 평화롭게 보내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마침 주말이 새해로 넘어가는 기점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정말이지 혼자 있을 시간이 절실했다. 마치 결혼 전, 약속 없는 주말이 그랬듯이.

달은 잘 경청하더니,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세밑 저녁에 남편을 내쫓는 기분이었지만, 달은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가장 만만한 것은 역시 부모님 집이라,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는데. 어머니께서 내려오지 말라고 하셨단다. 그래도 아내가 애처롭게 호소하니, 일단 집을 나서야 한다. 달은 그렇게 집을 떠났다.

슬쩍 미안한 마음이 들어 전화를 했을 무렵, 달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짧은 통화를 마치고, 놀란 어조의 문자가 온다. 전화를 받느라 잠시 휴게소에 진입했는데, 바퀴의 볼트가 하나 빠져있었다고. 음, 이렇게 생명의 은인이 되는 것인가. 여하튼 그렇게 혼자만의 휴식을 누린지 만 하루만에 우린 다시 만나게 된다.

달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날은 푸근했고, 옹기종기 모여앉은 친척들의 얼굴도 무겁지 않았다. 시할머니는 천구백이십삼 년생. 살아온 날이 긴 만큼, 서린 이야기들도 많았다. 내가 주로 들은 이야기들은 우리 시어머니를 고생시킨 이야기였지만. 일 년을 반으로 뚝 잘라, 반은 큰 아들네서 반은 아버님 댁에서 머물던 할머니가. 큰아들 네로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 소식을 알게 되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대수술을 치르는 것보다 남은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나을 거란 진단에, 할머니는 병실로 옮겨졌다. 처음에 내가 왜 병원에 있냐며 집에 어서 가자던 할머니는 한 달 반 가량을 그렇게 버텼다. 그리고 겨울답지 않게 따스한 날, 돌아가셨다. 나는 할머니가 큰댁으로 가서 병원에 가게 된 것도, 너무 오래 고통스럽지 않게 가신 것도, 그리고 너무 매섭지 않은 날 돌아가신 것도, 할머니가 베푸는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우리 시어머니는 홧병이 올랑 말랑 힘들어하셨으니. 그러니 난 장례식장에서 틈틈이 어머니 얼굴을 살폈다. 어머니는 입관 예배 중 눈물을 쏟기도 하였지만, 손님들을 맞느라 분주하기도 하였지만, 그 모두엔 잔잔한 해방감이 깃들어 있었다. 어머니의 동생들, 그리고 그의 아내와 남편들도 조문을 왔다. 나는 그것도 외가라고, 그 자리에 엉겨붙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편히 여겨졌다. 달의 외삼촌은, 꼭 우리 외삼촌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왜 애교있고 농담 잘 하는 집안의 막내 캐릭터. 자리가 자리인지라 하하호호 웃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종종 미소를 짓고 농담을 나누었다. 기나긴 도리와 의무가 막을 내리면, 그런 훈훈함이 감도나 보다.

손주 며느리들까지 입은 상복은 예상보다 일찍 벗어제꼈다. 나는 다음날 출근 때문에 자리를 먼저 나와야 했다. 조용히 자리를 뜨려고 했으나, 타이밍을 잘못 잡은 덕에 일가 친척들 모두의 배웅을 받아야 했다. 고개 숙여 여러 번 인사를 드리고 나서, 달이 태워주는 차를 타고 역까지 왔다. 그리고 다시금 안녕, 인사를 나누었다. 하루에도 다섯 번 눈물을 훔친다는 아버님을 위로하며, 달은 부모님 댁에 머물고 있다. 아마도 내일 돌아올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내게도 선물을 주고 가셨다. 뜨거운 차를 음미하듯, 그 자유를 잔잔히 누리는 중이다. 맛이 꽤 좋다.    

덧글

  • 2017/01/05 09:2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1/05 14:5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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