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낯으로 그렇게 어떤 동네

낙엽이 발에 채이던 계절의 일이다. 얇은 코트를 입은 우리들은 청와대 옆 샛길로 숨어들었다. 이윽고 만난 조그만 레스토랑. 안쪽에 자리잡은 작은 룸에 모여앉자, 주방장 특선 요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외국 엄마를 둔 적은 없지만, 외국 엄마가 만들어줄 법한 음식들이었다. 다른 이들의 소감도 대체로 그러했다. 한낮임에도 와인을 마셨다. 그 덕분에 식사를 마치고 나갈 적엔, 우린 조금 더 친해져 있었다. 자리를 옮겨 보광동으로 향했다. 어둑어둑한 실내의 구석에 앉아 진한 커피를 마셨다. 테이블 위엔 여러 이야기들이 오르내렸다. 호빗 하우스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원서동에 대해, 그리고 자기만의 방에 대해.

인공지능 알파고에서 시작해 북촌이 내려다보이는 전경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안, 모두 잠자코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를 마쳤을 때, 일흔이 넘은 수필가 선생님께서 내게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나 자기 너무 마음에 들어요, 란 찬사와 함께. 그렇게 엉겁결에 손을 맞대었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며, 언제 초대할거냐며 편집장 오빠는 입을 씰룩였고, 우리는 곧 모시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때가 계약금만 걸어둔 상황이었으니, 아직 공간의 구상은 시작되지도 않을 때였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났다.
숫자를 붙여가며 쓰던 지난 글들을 읽어보니, 그 텅빈 공간에 눈길이 간다. 나는 공간이 지닌 가치만 믿고 인생 가장 큰 모험을 저질렀다. 그때의 나는 누가 일러주지 않은, 혼자만의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신나고 흥미진진한 일이 또 있을까. 내 앞의 미래는 온통 핑크빛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창밖을 바라보면, 역시나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남쪽의 고층 건물들엔 불이 반짝반짝 켜지고, 나무들이 우거진 경복궁은 잠을 청한다. 한옥의 낮은 지붕들은 더욱 고즈넉해지는 가운데, 인왕산 성곽길엔 은은한 조명이 비춘다. 그것은 하늘과 산 사이 길게 드리운 실금 같았다.

후기도 몇 없는 이곳을 찾아주는 게스트들이 신기하다. 나는 그들의 체크인을 준비하며, 주변을 꼼꼼히 둘러본다. 그때 나는 호스트가 아니라 여행자의 마음이 된다. 두루 검증되지 않았으나, 취향과 감에 이끌려 집 아닌 다른 집을 찾는 사람들. 시간과 비용을 내어 이 동네와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이 편히 머물 수 있도록 살피는 것이 행복하다. 모르는 이들을 위한 마음도 그럴진대, 아는 이를 위한 마음은 더 그렇지.
삼 년 전 방콕의 기억이 너무 좋아, 우리는 가까운 여행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다녀온 이의 추천을 받아 온천 마을로 행선지를 정했다. 노천탕에서 몸 지질 생각을 하며 침을 꼴깍꼴깍 넘겼다. 각각 모일 비행편까지 다 알아본 다음날, 화산이 분화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모인 카톡방에서 우리는 어이없게 웃었다. 여행은 파토났지만, 모이기는 해야겠다 싶을 무렵 이곳 소식을 알렸다. 잽싸고도 쿨하게 바로 결제한 언니 덕에 우리는 날을 정해 둘러앉았다. 결혼을 한 달 앞둔 이가 있으니, 겸사겸사 청첩장 전달도 이뤄졌다. 나는 그 밤을 버진 없는 버진 파티라 불렀다. 우리가 함께 헤아린 밤이 몇 밤이던가. 해가 바뀌었으니 무려 팔 년째다. 그사이 주종은 늘 바뀌었으니, 오늘은 현지에서 직접 공수해 온 데낄라였다. 온더락으로 먹었다가, 콜라도 섞었다가, 주스도 섞었다가 하는 사이 밤은 깊어갔다. 그 사이 우리는 손톱을 칠하고, 타로카드를 섞었다. 모인 밤이면 늘상 하는 것들인데, 해도 해도 재미있는 그것들. 나는 자기만의 방의 운명과 나의 새해 운세를 점쳤고, 놀라울 만한 점괘를 들었다. 기분이 덩실덩실한 가운데, 밤이 늦도록 무얼 계속 주워먹으며 노닥거렸다. 사는 이야기들, 여행 이야기들, 회사 이야기들이 오르내렸다. 서귀포의 낚시배부터, 파리의 집시, 그라나다의 주술사까지. 가장 웃긴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무능력한 과장들이 너무 많다라는 내부 고발에 대응하는 회사의 방침은? 과장 전원 차장 승진. 더이상 이곳에 무능력한 과장은 없다. 무능력한 차장들만 있을 뿐이지.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낄낄거리고 웃다 새벽녘에야 잠들었다. 다음날 흥하라는 덕담을 남기고 떠난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베갯잇과 이불커버를 벗겨내고 새로 씌우는 일들. 나는 이제 부피도 큰 구스이불의 커버를 아주 손쉽게 다룰 수 있다. 곳곳의 청소들도 물론. 언니들에게야 나 이불 빨다 죽을듯 이라고 농담했지만, 그것들은 하나도 힘들지 않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집안일이 빨래 아니던가. 빳빳하게 잘 말라 햇볕 냄새를 머금은 시트들과 부대끼는 일이 즐겁다. 개운하고 정결한 행복.

오늘은 그곳에 달의 친한 형님이 놀러와있다. 너무 웃긴다며 보내온 문자에는, 아홉시에 집에 들어서 사십분째 칭찬을 이어가고 있다는 말이 이어진다. 나는 문자를 보며 몸을 배배 꼬는데, 그것은 겸연쩍고도 뿌듯한 팔불출의 정신이다. 칭찬 세례에 그러려니 하고 으쓱할만큼 아직 낯이 두껍지 못하다. 그 얇은 낯으로 꾸준히 가보련다. 처음 그 집에 들어섰을 때의 그 마음으로.  


덧글

  • 2017/01/11 16:54 # 삭제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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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량 2017/01/11 17:47 #

    네 죄송합니다... 침대가 하나라서요.
    최대 2인까지 묵기에 적합합니다.
    다음 기회에 뵙길 바랄게요 ^^
  • 2017/01/11 20:18 # 삭제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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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량 2017/01/12 08:43 #

    전에 살던 집주인 분의 아버님이 만드신 것으로 알아요
    ㅎㅎ 냉장고 옆에 놓은 원목박스 보이시나요? 아래에 놓인 것처럼 앞면을 닫을 수 있고 위에 놓인 것처럼 열 수도 있고.. 그거 4개를 붙여서 토스터랑 커피 머신 놓은 거예요. 구입처 알려드리지 못해 아쉽네요 ^^;;
  • 2017/02/08 22:21 #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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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08 22:52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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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0 10:0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7/02/10 11:20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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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13 19:06 # 삭제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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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13 19:07 # 삭제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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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량 2017/05/13 20:58 #

    안녕하세요 ^^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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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가 링크 주소인데요. 아쉽게도 당분간은 예약이 있어서 27일은 어렵네요. ㅠㅠ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놀러오세요. 어제 오늘도 블로그로 알게된 분이 머물고 계시거든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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