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상 어떤 동네

스크롤을 몇 번 굴리는 사이, 혹은 엄지를 몇 번 튕기는 사이 풍경은 조금씩 달라진다. 맑았다가 흐렸다가, 밝았다가 어둡다가 그렇게. 여름에 머물 숙소를 찾기 위해, 다른 나라의 숙소를 뒤적거렸다. 비 오는 일요일 밤, 종로의 스타벅스에서였다.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 예약 확정 버튼을 누르자, 호스트인 소피아에게 보낼 메시지 창이 뜬다. 여행의 목적과, 자신을 비롯한 동행인에 대한 소개를 해달라는 글과 함께. 그렇게 우리는 간략하게 우리 자신에 대해서 쓴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자기만의 방을 찾는 게스트들도 이렇게 자기 소개들을 했겠구나.

가장 길고 긴 소개를 썼던 크세니아는 지금 원서동에 머물고 있다. 크세니아는 러시아 사람, 그리고 앤트워프에 적을 둔 사진 작가. 자신은 이런이런 작업을 해왔으며, 한국에도 작업 차 방문한 적이 있다는 메시지였다. 크세니아가 온다는 시간, 우리는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공항버스에서 내린 크세니아가 횡단보도를 건너 우리에게 왔다. 예상한 대로 가방은 무지하게 크고 무거웠다. 3주간의 여행이었으니.

집의 여러가지를 설명해 준 다음, 냉장고를 열어보였다. 거기엔 4개에 만원인 세계맥주들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형광분홍색 병의 소주도. 크세니아는 필스너를 좋아한다며 기뻐했다. 그래서였을까. 작별 인사를 건네고 나가려던 나를 두고, 서둘러 캐리어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건넨 초콜릿. 벨기에 초콜릿이라고 했다. 먼저 건넨 크세니아의 한글 명함과 초콜릿을 가방에 넣고 나왔다. 명함엔 국립현대미술관의 로고 아래 크세니아의 이름이 한글로 쓰여있었다. 창동 레지던시 입주 작가. 잇츠 마이 아너, 나는 과장되게 고개를 숙였다. 크세니아는 웃었다.

좋은 쉼이 되길, 그리고 영감을 얻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며칠이 지났다. 그간 크세니아는 'Hello, found you here too'로 시작되는 카톡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오후, 아직 한참 남은 유월의 예약 신청 알림이 울렸다. 자세히 보니 크세니아다. 유월 중순의 이 주간의 예약. 나 이 곳이 너무 좋아. 유월에 다시 올 일이 있는데 그때 머물고 싶어. 사실 체류 일정은 더 긴데, 앞 뒤로 다른 예약이 있는 거 같더라. 혹시 그 예약들이 취소되면 나에게 알려줄래? 라는 말과 함께. 체크아웃을 하기도 전에, 다음 번 예약을 잡는 마음. 그건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침실 창 앞엔 작은 책상이 있다. 그 위엔 무지 노트와 볼펜이 하나. 다녀간 이들은 거기에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남겨두고 간다. 다정하고 상냥한 인사들. 잘 쉬다 가요. 다음에 또 올게요. 같은 말들. 페이지들을 넘기다 막연히 생각해 오던 어떤 것이 떠올랐다. 방명록이 아닌 그냥 노트에, 아무나 자유롭게 자신의 문장을 한 두줄 남기는 거다. 여행에 관한 것도, 날씨에 관한 것도, 자신에 관한 것도 다 좋다. 그냥 앉아서 노트를 폈을 때 생각나는 생각을 옮기는 노트. 그걸 모아서 엮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만들어 볼 수도 있겠지. 묵직한 어깨와 등을 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자기만의 방


덧글

  • 2017/03/09 23:4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3/11 18:5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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