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방 어떤 동네

늦가을에서 겨울을 지나 봄에 이르기까지. 반 년쯤 흘렀다. 좁다란 골목길을 내달아 집에 다다르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마음이 산란하고 복잡할 때일수록 더욱 그렇다. 패브릭 종류를 걷어내 세탁기를 돌리고, 분류해 놓은 쓰레기를 모아 현관 앞에 두고 청소기를 꺼낸다. 오 일의 휴가를 보내고 간 게스트는 게스트북에 첫 날과 마지막 날의 감상을 나란히 적어두었다. 새벽녘 작성했다는 마지막 인사에 나는 조용히 켜둔 스탠드와 한 사람을 위한 책상을 상상한다. 그건 쉽게 묘사하기 힘든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상호 호혜적인 관계. 우리 사이에 합당한 비용이 오고 갔음에도, 서로에게 비용 너머의 고마움을 건넨다. 게스트북을 접고서, 나는 다시 씩씩하게 좁은 집을 돌아다니며 청소기를 민다. 노동의 기쁨, 기쁨의 노동.
오늘도 세탁기는 열심히 돌아간다. 굽힌 허리를 펴며 잠시 한숨을 돌릴 무렵엔 커피가 제격이다. 작정하고 우유를 사간 날. 처음으로 라떼를 만들어 먹었다. 냉동실엔 게스트가 얼려둔 얼음이 있다. 들고 난 이는 무심히 흘려도 나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 정말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지내다 갔구나. 책장에 꽂아둔 책들의 순서가 이리저리 바뀌어 있다.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었을 생각을 하면 기쁜 마음이 샘솟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홀짝홀짝 차가운 라떼를 마신다. 비가 뿌려 흐린 하늘 아래의 풍경. 오후 여섯 시가 되자 교회의 종소리가 들린다. 간격은 일정한데, 각각의 진동은 불규칙하다. 사람이 직접 울리는 것일까. 까치도 이에 질세라 깍깍 운다. 그새 창문 가장자리 벽을 타고 담쟁이가 자랐다. 가느다랗게 메말랐던 가지에 물이 오르고, 새로 단 이파리들은 초록으로 싱싱하다.
선물 받은 몬스테라. 이 자리가 적당하다 싶어 놓았는데, 높이가 영 어정쩡하다. 덕분에 집에 있는 모든 받침대 및 의자들이 동원되었다. 마지막으로 낙찰된 것은 톤 다운된 브리티쉬 그린의 테이블. 오래 오래 잘 자라주면 좋겠다 생각한다. 길게 머무는 게스트들에게 물 주고 바람 쏘이는 것을 부탁해도 될까 생각해 본다. 식탁 옆 테이블 야자도 잘 돌보아 주었던 걸 생각하면 왠지 안심이 된다. 밑도 끝도 없이 샘솟는 믿음.
지난 겨울 아란 씨가 주고 간 선물. 그땐 그저 막대 같던 대나무였는데, 그 사이 실낱 같은 뿌리도 자라고, 이파리도 힘껏 틔웠다. 남몰래 느리게 열심히 자라고 있다. 그 자람이 기특해, 이 날은 부엌 창가를 떠나 남향의 명당에서 한껏 볕을 받게 두었다. 이파리 너머로 흐릿한 남산. 밝고 맑은 날이 이리 애틋할 줄이야. 감탄엔 서러움과 반가움이 섞여있다. 집 안팎을 들고 나는 나의 동선은 현재형으로 묘사하면서, 식물들의 자람은 과거형으로 그리게 된다. 인간이 관찰하기엔 너무 느린 속도라 그렇겠지. 언제나 지나고 보니 훌쩍, 이 되곤 한다. 지나고 보니 훌쩍, 나는 우리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오 월도 중순이 코 앞이니 드는 생각이다. 언제나 무럭무럭 자라고 싶다. 마음도 생각도.



원서동, 자기만의 방


덧글

  • 낮술먹은 북극여우 2017/05/15 10:30 # 답글

    몬스테라 너무 탐나구요-
    카페에서만 보다가 실제로 선물받은 사람 처음 본다앙!

    저 대나무 정식 이름은 개운죽이에요 :)

    잘 지내고 있어요?
  • 한량 2017/05/16 20:40 #

    전 저 식물 이름도 이번에 처음 알았답니다. 죽일까봐 겁나요...... ㅋㅋㅋ
    부디 잘 자라줘야 할 터인데 말이죠. 아, 안 그래도 저 어젠가 그젠가 여진님 생각했어요.
    그때 말씀하시던 책은 잘 진행중일까 하구요. 이것 저것 많이 바쁘시죠?
    스페인어도 여전히 배우고 계셔요? 시간 되실 때 연락주셔요. 저 요즘 시간 많아요.
    만나서 그 사연도 좀 풀고 싶네요. ㅎㅎㅎㅎㅎ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