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 일상

출판사 다니는 친구가 단체채팅방에서 주문을 했다. 열한 명의 명사 인터뷰를 모은 신간에 붙일 제목을 생각해 보라며. 우리들은 떠오르는대로 몇몇을 꺼냈으나 다 퇴짜 맞았다. 친구가 나를 콕 찝어 내 생각이 중요하다 했다. 여기서 책 사는 것은 나뿐이라며. 그러나 멍청한 내 머리에 제일 근사하다 싶은 제목은 '11간지'. 나는 이걸 두 번이나 밀었으나 친구는 키읔만 찍었다. 들킨 것 같았다. 나 사실 예전처럼 책 안 사..
교보를 사설 도서관처럼 다니고 있다. 얼마나 눈물나는 기쁨인가. 평일 한낮의 도서관 아니 서점은 숨막힐 듯 붐비지 않는다. 몇 바퀴 돌지 않고서도 앉을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알맞은 자리에 자리잡고 앉아, 우연히 발견한 신간을 폈다. 그리고 빠져들었다. 진짜 같은 가짜 이야기들. 그 가짜가 얼마나 진짜 같았냐면, 읽는 동안 아 이건 픽션이지 괜찮아 하고 마음을 추스리며 고개를 들어야 했다. 안도 아닌 안도를 느끼며, 나는 내 공감 능력이 이리 출중했었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때 소설과 멀어지던 때. 나는 진짜 세계를 취재하고 겪어낸 사람들의 말에 이끌렸다. 나와 날마다 부딪치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시도는 절반쯤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다 해가 기울고 달이 차듯 다시 여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되짚는 사이에서, 단순한 욕망이 싹튼다. 옛날 옛적에 어느 마을에, 로 시작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욕망. 친구가 기억하는 나는 정말 책을 많이 샀었는데, 그땐 내 인생에서 제일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좁은 방에 엠디에프 책장을 구비구비 쌓아놓고, 책과 책들을 끼워넣던 때. 익숙한 언어를 조립해 담아낸 문장에 감격하던 때. 나는 내가 모국어의 독자라는 것이 기뻤다. 
결국 이야기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중첩된 시기에 사춘기를 보낸 것은 행운이었다. 많고 많은 테이프를 모았었고, 힘 주어 두 버튼을 눌러 라디오를 녹음했었다. 물리적인 한계가 빚어낸 재간들. 테이프의 에이 면과 비 면을 바꾼 시도나, 깜짝 선물같은 히든 트랙을 우연히 발견하는 일은 이제 없겠지. 공부할 때 집중하려면 필요해요, 란 말에 씨디피를 얻어냈다. 뭘 사달라고 말해본 적 잘 없는데, 그러길 잘 했지. 정말이지 가장 집중해 공부를 아니,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은 독서실이었다. 조심조심 북클릿을 펴들고 가사 한 줄을 눈으로 따라가던 때. 어두운 방, 내 머리맡의 하얀 등. 잘못한 것 하나 없으면서, 나는 참회하듯 자주 울었다. 윤동주는 맨날 뭘 그리 속죄하는 거야, 투덜대면서 정작 이어폰 꽂고 우는 건 나였다.
회사를 떠난 지 한 달이 흘렀다. 죽기 살기로 꾸역꾸역 집을 나서던 때의 필사적인 독기가 서서히 빠지고 있다. 발가락의 회복과 함께 요가 수업도 듣기 시작했다. 나무랄 것 없는 날씨와, 조용한 동네 그리고 고양이들이 나를 치유해 준다. 그와 더불어 나는 천천히 퇴행하고 있다. 예전 시절로 너울너울 날아가, 오래토록 좋아하는 것들을 반복하며 좋아지고 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새롭고 신기한 것은 무서우니까. 친절한 은행 직원이 웃으며 권유하던 앱 설치도 거절했으니까. 당황함을 가리며 왜 싫으시냐고 묻던 직원에게, 이런 것들이 너무 쉽게 돈을 쓰게 만드니까요 라고 답을 했었다. 친구들은 이 에피소드에 엄청 웃어댔다. 아니 너 그렇게 쉽게 쓸 돈은 있냐고. 아니 없지. 없는데.. 누가 보면 엄청 구두쇠에 갑부인 줄 알겠으나, 그저 나는 구닥다리의 수구파일 뿐이다. 변하지 않는 것들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그런 사람.

덧글

  • 2017/06/03 10:0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고슴도치 2017/06/05 15:40 # 삭제 답글

    수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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