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명절의 며느리 일상

올해 설은 교토에서 보냈다. 거기엔 나름의 이야기가 있다. 시부모님은 시할머니를 십 년 넘게 모셔왔다. 일 년의 절반은 시부모님 댁에서, 나머지 절반은 아버님의 형님 댁에서. 그러나 부양에 관한 중립적인 서술은 자연스레 어머니 중심의 서사로 기운다. 그간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어깨 넘어 듣기에도 장황했다. 급기야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그냥 무턱대고 떠나세요. 이모님들이랑 같이 멀리 여행 다녀오세요. 라고 며느리인 내가 종용할만큼. 그때 내 마음은 매우 솔직하고 노골적이었다. 그간 너무 오래 지워진 의무에서 벗어나길 응원하는 마음. 그때도 어머니는 니 마음이 참 고맙다, 하시며 여행은 다음에 갈게. 라고 하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시어머니는 장례식장에서 많이도 우셨다. 내가 어디 그 마음을 다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더이상 애면글면 애쓰지 않으셔도 된다는 점에 마음이 놓였다. 어머니께서는 어떠신지 몰라도, 층층이 쌓인 의무로 가득한 세상이 나는 몹시 지긋지긋했으니. 부모 밑에서 이십 년 자라 혼자 삶을 꾸려낸 경력은 같은데, 결혼 후 내게만 기대되는 의무에 나는 치를 떨었으니. 어머니더러 의무를 박차고 떠나시라는 입김은 사실 내 안에서 가장 크게 이는 것이었다. 사극에 등장하곤 하는, 왠지 눈빛이 형형하고 어딘가 불손한 기운이 감도는 그런 노비. 언젠가 크게 일을 한 번 칠 것 같은 그런 인물. 그게 나였다.

설날. 우리는 김포, 시부모님은 김해에서 출발해 오사카 공항에서 만났다. 나는 적잖은 부담을 안고 여행에 임했으나, 여행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달이 모든 가이드를 도맡으며 제대로 효도하는 동안, 나는 적절한 타이밍마다 호텔에서, 까페에서 홀로 쉬는 시간을 누렸다. 그래도 모두가 행복했다. 나는 매끼 다 사먹고, 마음껏 군것질하는 것이 제일 좋았다. 저녁 무렵 돌아와 안녕히 주무세요, 인사하고 우리 방에서 발 뻗고 눕는 것이 좋았다. 그 누구도 일하지 않아도 된다. 명절의 지엄한 의무인 '먹는 것을 차려내고 그것을 치우는 일'에 여자들만 종사하지 않아도 된다. 쌀 한 번 씻지 않는 이들이 앉은 자리에서 태연하게 밥 더 달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 마지막 밥술을 내려놓기 전부터 뒷정리에 관한 눈치게임을 하지 않아도 된다. 온힘을 다해 아들이 고무장갑 끼는 것을 막아서는 어머니를 보지 않아도 된다. 그 풍경 안에서 애매하게 웃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돌아서면 밥, 돌아서면 밥, 의 쳇바퀴에 동참하지 않아도 된다. 난 그게 정말이지 행복했다.

그 기억이 좋아서 그랬던걸까. 이번 추석엔 서울에서 보내자고 청했었다. 시누이가 조카와 함께 한국에 와서 더욱 그랬다. 결혼하고 떠난 지도 삼 년. 우리한테 아기 맡기고 친구들을 만나면 좋을 것 같다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외국에 있는 친구들, 아기가 있는 친구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지 내가 아니까. 일이 그렇게 순조롭게 풀렸다면 몹시 아름다운 그림이었을텐데, 내가 내 속이 곪아가는 것을 못 참고 추석 못 미친 여름께 크게 질러버렸다. 그간 차곡차곡 쌓아온 감정들이 한 순간에 타올랐다. 요지는 간단했다. 나는 밥하는 사람이 아니니 당연스레 그 의무를 내게 지워주지 말라는 것. 그렇게 장문의 문자를 써 본 적은 나도 처음이었다. 당연히 평지풍파가 일 수밖에. 구 월 초에 시사촌 결혼식이 있었는데, 나는 내려가지 않았다. 달은 그 자리에 참석을 했고, 자연스레 나온 이야기에 나를 대변하여 혈전을 펼쳤다고 했다. 얼마나 참혹했던지 시어머니도 시아버지도 펑펑 우셨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추석은 코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니 역대급이라는 이번 연휴가 마음 편할 수가 있으랴. 마음 속이 엎치락뒷치락하기도 여러 번이었으나, 나의 결심은 단호했다. 나는 시댁에 내려가지 않을 거다. 원래 이야기 되었던 것처럼 서울에 오시면 만나겠다. 그 고집에는 오직 한 가지만이 작용했다. 부엌이 있는 곳에서 만나지 않을 것. 누군가 자연스레 밥을 차리고 상을 거둬야 하는 자리에 가지 않겠다는 것. 명절엔 다같이 쉬고 놀아야 한다. 누구는 일하고 누구는 소화불량을 호소해선 안 된다. 나와는 다른 종류였겠으나 껄끄러움은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나중에 듣기로는 어머님의 주장으로 모두가 오게 되었다고. 이번에 내가 오라고 요청하는 것에 가지 않으면 앞으로 나와의 관계가 겉잡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셨다고. 원서동 집을 쓸고 닦으며 나 역시 마음이 심란했다. 그리고 부모님, 시누이, 그리고 조카가 도착했다.

얕게 언 얼음이 파삭, 하고 깨지는 느낌이 났다. 우리는 적잖이 어색했으나 이 자리엔 아기가 있다. 아기의 찧고 까부는 재롱에 분위기는 자연스레 부드러워졌다. 여기서 찧고 까부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묘사다. 아이 없는 우리 부부가 너무 신나게 놀아주는 바람에 아기가 바닥에 얼굴을 찧는 일이 일어났다. 다행히 금세 회복하였지만. 그렇게 요란하게 시작된 삼 박 사 일의 일정. 북촌의 온갖 곳을 쏘다녔다. 궁궐들을 누비고, 도서관에서 볕을 쬐었다. 대통령이 다녀갔다는 수제비 집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부암동에서 커피를 마신다. 우리가 사랑하는 동네에서 만끽하는 연휴. 마침 날씨도 마법 같아서 우리의 나들이는 발랄했다. 시누이는 야무지게 세 명의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 나는 그것이 정말 기뻤다. 멀리 있는, 못 본 지 오래된 내 친구들이 생각나서. 그 만남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기에. 비록 조카의 체력에 내가 못 미쳐 먼저 고꾸라질언정 나는 최선을 다했다. 열과 성을 다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면 집에 돌아와 쓰러져 잤다. 그럼에도 나는 서글프지 않았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다같이 즐겁게 놀고 행복해하는 명절.

내가 용기가 없어, 달이 티나게 마련하려는 어머님과의 자리를 마다했다. 둘만 남아 말문이 트이면, 동시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작해야 마지막 인사 때 한 번 안아드리는 것이 전부였는데. 지난 오 년의 역사 동안 이심전심이 통했는지, 이번 추석이 너무 즐거웠다는 답이 도착했다. 나는 그게 더없이 기뻤다. 앞으로도 우리가 이런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길 바란다. 그게 진정한 내 진심이다.

덧글

  • 2017/10/11 21:18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7/10/11 22:40 #

    아, 육아 이후의 삶에 대해선 정말 저도 아는 바가 없어서.. 막연히 그쯤 되면 더 깡?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역시 어려운 건 어려운 일이겠지요.
    늘상 순종하는 며느리는 아니었지만, 정말 아 더는 못 참겠다란 순간이 불현듯 찾아와서 저도 그냥 터져버렸어요.
    흔히 말하는 분란 일으키는 며느리? ㅎㅎㅎ
    그리고 당연히 그 후에도 속앓이 했지요. 그런데 할 말 다 하고 나니 걸려오는 전화 없고, 그래서 싫은 소리 참으며 웃지 않아도 된다는 게 너무나 좋았어요. 앞으로 또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으나.. 돈을 펑펑 쓰더라도 이렇게 노는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만오천보 걷고 지쳐누워도 마음은 안 힘들었거든요. 흐흐 기억할만한 추석이 되었습니다!
  • 이온 2017/10/11 21:54 # 답글

    한량님 항상 글 잘 보고 있어요. 이번 글은 저에게도 사이다를 병째로 들이킨 것 같아 부러 댓글 남깁니다. 며느라기들의 처지는 어찌나 다들 한결같고, 아들들은 어째서 늘 부엌 문지방도 넘어서면 큰일나는 걸까요. 저도 이미 '둘러엎음'을 시행한 지 좀 되어서 그나마 남들보단 덜 속터지는 명절을 보냅니다만, 그래도 속 시끄러운 일이 전혀 안 생기지는 않더라구요. 모쪼록 앞으로도 우리 모두에게 시댁 다녀와서 소화불량이 생기는 일이 없길 기원합니다 :)
  • 한량 2017/10/11 22:44 #

    반갑습니다! 저는 또 되게 좋았던 것이 이렇게 보낸 명절을 어머님도 아버님도 좋아하셨던 거예요. 서울의 곳곳을 구경다니고 맛있는 거 사 먹고.. 약간 효도여행 느낌? ㅎㅎ 그래서 이게 가족들 모두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다음 명절에도 작은 변화가 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저희 시어머니가 무슨 드라마에 나오는 악역처럼 저 부려먹고 그런 거 아니지만, 명절마다 맞닥뜨리는 불공평한 자리가 참 싫었거든요. 아, 또 하나 알게 된 거. 운전하는 역할을 빼고 나니 명절에 남자들이 하는 일 진짜 없더라고요.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는 거 그게 다.. 그래, 그럼 다 같이 놀자. 다 같이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야한다. 그래야 웃으면서 또 만나서 함께할 마음이 생기는 거니까요. 앞으로도 힘써보겠습니다. 우리 같이 힘내요!!
  • 떡잎 2017/10/11 22:15 # 답글

    한량님 존경합니다. 정말 쉽지 않으셨을 거라는걸 피부로 느낄 수 있기에 그 용기에 혀를 내두르며 읽었어요. 저도 집과 사무실 어디에서나 불손한 기운이 감도는 노비로 살 수 있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정말 멋져요. 이 이야기의 해피엔딩을 가슴 떨리게 응원합니다.
  • 한량 2017/10/11 22:49 #

    잎새님!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용기 내어본 적이 인생에서 몇 없어서.. 다시 말하면 되게 권력 순응적인 인간이었단 말... 암튼 그 속시원한 경험은 정말 새로웠어요. 생각해 보면 일 년에 두 번인데, 같이 잘 놀기 위해 돈을 모아놔야겠단 생각도 좀 들었고요. 정신 건강을 위해 그정도 투자할 수 있단 마음이 들어서요. ㅎㅎ 제 동생도 나중에 장가가면 우리집 분위기도 조금 달라질텐데, 미리 잘 연습해두려고 합니다. 잎새님도 언제나 늘 화이팅이에요!!
  • 2017/10/12 10:2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10/16 16:3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7/10/12 16:4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10/16 16:3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7/10/14 00:52 # 답글

    항상 눈으로만 한량님의 글을 잘 읽고 지나갔던 사람인데, 이번 글은 그냥 지나칠수가 없군요! 저도 결혼이란것을 하고 두번의 명절을 거치면서 같은 갑갑함을 느끼고 어쩔줄 몰라하고 있습니다 불공평없이 같이 즐기고 같이 노는 명절! 그거예요 바로..! 그게 왜 힘든걸까요 힘들어야할까요 ㅜ 한량님을 응원합니다 시부모님의 즐거웠다는 문자가 저까지 기분이 좋으네요
  • 한량 2017/10/16 16:35 #

    첫 명절 때 기분 진짜 이상하지 않아요? 그건 저나 우리 세대 새댁들 말고, 우리 어머니들도 다 그랬을 거 같아요. 새로 맞춘 한복입고 새색시 대접받으며 앉아있어도 어딘가 서글프고 우울하더라구요. 여기서 나는 뭐하고 있나.. ㅎㅎㅎ 다 같이 놀고 즐겁게 보내는 명절을 맞기 위해서 미리미리 돈 모아두려고 해요. 돈 쓰고 기분 좋은 게 훨씬 나으니까요. 내년 설을 위해 미리 궁리해봅니다. ㅎㅎㅎ
  • 시와 2017/10/14 08:36 # 삭제 답글

    축하해!! 어쩐지 축하한다는 말을 남기고 싶!!!!! 즐거웠다는 문자를 받은 대목에서 내가 눈물이 줄줄줄 흐엉
  • 한량 2017/10/16 16:37 #

    ㅠㅠㅠㅠㅠㅠ 축하 감사해요. 이게 뭐라고 저도 으쓱한 기분을 숨기고 싶지 않네요. ㅋㅋㅋㅋ 그럼 일요일에 만나요. 꺄!!!
  • 낮술먹은 북극여우 2017/10/16 08:11 # 답글

    "나는 밥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라는 간단한 한 마디,
    그거 하나 전하기 정말 쉽지 않아서 다들 몇 십년을 고통받는데 ㅠㅠ

    은아님 ㅠㅠ 정말 애쓰셨어요. 지난 5년간 맘고생 한 것두..

    모두가 즐거운 명절. 진짜 그거 아니면 명절 왜 있을까요.
    차라리 명절 안쇠고 말지.
  • 한량 2017/10/16 16:39 #

    아, 우리 너무 공감되고 그렇죠. 새색시나 오 년 차 관록의 며느리나 ㅎㅎㅎ 이렇게 슬금슬금 문화를 바꾸다보면 이 모든 이야기가 전설처럼 되지 않을까요. 전 거기에 희망을 걸어요. ㅎㅎ 늦었지만 다시 한 번 결혼 축하드려요!!
  • 황선생 2017/10/18 10:59 # 삭제 답글

    지난 번 문자 보내셨단 글 보고 정말 놀랐어요. 그리고 궁금했던 것이 과연 남편분은 같은 마음이신가 였는데, 이번 글을 통해 궁금증 해소ㅎㅎ 역시 그런 용기를 내는 것엔 남편의 지지가 있었네요! 정말 두분은 여러 글에서도 묻어나지만 천생연분인 것 같아요^^ 생각이 잘 맞는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죠. 그런 두분인데 가끔 생각이 맞지 않은 대척점도 있다는 글 보면 놀랍기도 하구요. 안 맞는 영역이 대체 뭐지 막 궁금하기도 하고(내가 왜 궁금하고 난리ㅋㅋ). 암튼 모두가 즐거운 명절을 개척해나가는 한량님, 가족들 즐겁게 해주려고 여러모로 힘쓰는 모습 속에서 배려가 돋보이네요. 그 마음을 시부모님도 느끼셨으니 변화를 기쁘게 수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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