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 연정 일상

'십칠 년 지기 친구를 소개합니다.'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나는 계단을 걸어올랐다. 적잖이 떨리는 자리였다.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서둘러 산 음료는 이미 다 마신 지 오래.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곤 반으로 접은 종이를 폈다. 그리고 또박또박 들리길 바라며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갔다. 내 앞에 그 오래된 친구가 서 있었다.

청첩장을 받고 난 후, 연락이 왔다. 결혼식에서 축사를 해 줄 수 있냐는 부탁과 함께. 해 본 적 없는 일임에도,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시시덕거리며 농담을 주고 받았다. 워터프루프 제대로 칠하고 와라, 검은 눈물 흘리면 좀 그렇잖아, 하며. 거기까진 농담이었는데, 배경 음악으로 국경의 밤을 선곡한다는 말엔 마음이 덜컥했다. 진짜로 울 거 같은데 어쩌지. 하면서.

이런 글은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틈틈이 떠오르던 생각들을 그러모아 써내려간 것은 결혼식 전날 밤이었다. 방문을 닫고 앉아 맥주 한 캔과 함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결국 완성된 글은 오랜 시간 서로를 지켜보며 응원한 친구에 대한 마음이 팔십 프로,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이 이십 프로 정도 되었다. 순간 곁에 설 신랑을 너무 들러리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었으나, 그냥 내 마음이 그리 움직였다. 이렇게 공개적인 사랑 고백은 나도 처음이었다.

일찌감치 도착하니, 친구는 막 신부 대기실에 들어선 참이었다. 다가가 웃는 사이, 친구의 얼굴이 삐죽거리기 시작한다. 벌써 울음이 터지려는 거다. 나는 잠시 재롱을 떨어야 했다. 벌써부터 그러면 안 되는 일이니. 식장으로 돌아와 종이를 폈다 접었다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어젯밤, 타이머를 켜두고 낭독 연습도 여러 번 했는데. 문단과 문단 사이 적당한 휴지를 두고자, 선도 그어두었는데. 어째 그 모두가 흐려보였다.

마이크를 잡고 서자 국경의 밤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간결한 피아노를 배경으로 입을 떼기 시작했다. 슬몃 바라본 친구의 눈은 흔들리고 있다. 입이 삐죽거리고 있다. 나의 목소리도 따라 떨리기 시작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들어선 하객들로 눈을 옮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점묘화의 점처럼 보인다. 반절이 넘어갈 무렵엔 친구도, 나도 안정을 찾았다. 신랑은 벙싯벙싯 웃고 있고, 친구의 얼굴에도 울음대신 평안이 찾아왔다. 마지막 인사를 읽고, 내려왔을 땐. 어찌된 일인지 달이 울고 있었다.

다음 날 찾은 공연에서도 역시나 위기가 찾아왔다. 사랑하는 사이임을 선포하는 두 사람이 즉흥적인 공연을 펼쳤다. 예전에도 많이 듣던 그 노래가 이렇게 들릴 줄은 몰랐다. 가사 하나하나가 마음에 콕콕 박혔다. 나는 맨 앞 줄에 앉아 찔끔찔끔 울었다. 알고 있었다. 문제는 공연도, 가사도 아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해결되지 않은 숙제. 서로를 향해 오가는 날선 말들. 그날 저녁 울음은 주인을 찾았다. 달과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그런 담담함이 필요했다. 그 동안은 늘 감정이 먼저 휘몰아 쳤으므로. 이야기의 말미에 실컷 울고 나니, 부은 눈과 함께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러나 내 마음의 폭풍은 잠시 묻어둔 것일뿐, 해결은 가깝지 않았다. 그것은 실재하는 미래였으므로.

크나큰 결심을 앞두고 있다. 마음이 좌로 우로 격렬히 움직인다.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불안과 기대가 섞여든다. 가장 가까운 이들은 말한다. 서른 셋이면, 이제 결실을 맺어야 하지 않나라고. 그것은 일에서의 입지, 안정성, 저축, 그리고 출산과 육아가 될 테다. 나는 만으로 서른 하나, 그것도 십이월 생이라고 속으로만 말한다. 내 마음이 향하는 곳은 그것과 정반대의 길이기에. 직장을 그만두고, 단어의 철자부터 배워야 하는 불안한 학생으로, 낯선 땅에서 홀로 견디는 삶. 보장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외로움과 고독만이 함께할 삶. 시일이 멀다고 생각했을 땐 여유있던 내가, 계절이 바뀌니 조급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더불어 쉴새 없이 요동치는 마음들. 그러나 언제나 새로운 국면은 갑작스레 온다. 우연히 만들어진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내가 보수적인 선택이라 생각했던 것을 모두 뛰어넘는 말이었다. 요점은 간명했다. 일하는 엄마가 돌보지 않는 아이들의 결핍이 슬프다는 말.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세상은 '슬프다'라는 감정보다 훨씬 복잡했기에. 문자 그대로의 가부장의 세계 안에 모두가 안락하게 노닐 수 없음을, 그리고 모두가 그것을 안락하다고 느끼지 않음을 알기에. 오직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슬프지 않게 의무를 다해야 한다면 우리는 무엇하러 공부를 해야 하나, 무엇을 위해 일자리를 구하고 그것을 견뎌야 하나. 또한 내 아이의 아버지이자 나의 남편인 이가, 죽는 날까지 모든 경제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인생에 있어 나와 나의 아이만 바라보지 않는다면, 고로 문자 그대로의 완벽한 가부장이 아니라면. 지금처럼 일하는 엄마의 아이를 동정어린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가 그 세계를 희구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간 불안한 마음을 붙잡느라 언제나 눈물이 장전된 상태였다. 손 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이제 나의 마음은 고요를 되찾았다. 평안이 그렇게 왔다.

덧글

  • 아줌마팬 2017/10/30 13:54 # 삭제 답글

    공부하시면서 싸이 블로그에 글 올리실때부터 팬이었는데아줌마가 된 후에도 한량님의 글을 보러 꾸준히 이곳을 찾고있네요. 어떤 선택을 하게되실지 정말 궁금합니다. 나름 오래전부터 한량님의 글을 보다보니 지금 하시는 고민..그리고 결국 어떤 선택을 하실지 알듯도 모를듯도.. 궁금도 하고 응원도 드리고싶네요. 안면식도 없는 제 맘을 이렇게 글로 훔치신거보면 그선택이 무엇이든 그에따른 결과가 정말 기대됩니다. 한량님.. 그리고 달님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 되길 바라요.
    그리고 오래전부터 한량님 글에 빠져 관음을 부리고 있는팬이 있다는게 조금이나마 응원이되길 바랍니다.
    제가 쓰는 처음이자 마지막 글이 되겠지만, 어떤 선택을 하시든 어느곳에라도 글한줄 적는일은 멈추지 말아주세요. 쉬는날 소파에 드러누워 종종 올라오는 한량님 글 읽는 즐거움이 사라질까 무섭네요. 그 어떤 형태로든 한량님의 글을 오래오래 보게되길 바랍니다. ^^
  • 한량 2017/10/31 19:03 #

    감사합니다.
    제가 뭐라고.. 늘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응원의 말씀 주시는 것,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니까요.
    일면식 없는 사이에서 나눠주시는 말씀들. 제겐 너무 고맙고 행복한 일이네요.

    저도 오래오래 일기같은 글들을 쓰고 싶어요.
    노트북에 앉아, 음악 틀어두고, 마실 것 하나 홀짝이며
    이런저런 생각을 글자로 옮기는 일이 아직까진 제일 행복한 일이거든요.

    때로는 일에서 오는 압박에서 탈출하고자, 구명정 붙잡는 마음으로 쓰기도 하고
    어느 때는 신나는 마음에서, 격정적인 마음에서, 이렇게 쓰기 시작한 글들이
    절로 시간을 먹어 쌓인 것도 신기하고요.
    이제는 이글루스 자체가 많이도 한산해졌지만,
    그래서 더욱 솔직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언제가 되었든 훅 떠나지 않을테니, 종종 들러주셔요. ^^
  • 2017/10/31 02:5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10/31 18:5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7/10/31 10:4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10/31 18:5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시와 2017/11/01 08:28 # 삭제 답글

    평안이 찾아왔다니, 다행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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