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 일기 어떤 동네

시드니에서 온 트레이시와 제시카가 떠났다. 아침 아홉시 비행기라서, 새벽녘 서둘러 나선다 했다. 나는 느지막히 오후가 되어 집에 들렀다. 빨랫감을 세탁기에 돌리고 기다리는데, 알림 메시지가 온다. 트레이시가 후기를 썼으니 확인하라고. 벌써 도착했단 말인가. 나는 아직 호스트 후기도 쓰지 않았는데. 궁금한 마음에 후기를 확인해본다. 언제나 이 순간은 조금 두근거린다.

“Beautiful space to stay at and was a great change from the hustle and bustle of Seoul. The living space and sleeping space was so spacious. The bathroom was clean and large enough. The amenities were all perfect. Euna was a great and attentive host who helped with any issues we had. Would recommend anyone as it was a very comfortable stay!!!”

느낌표를 팍팍 찍어 마무리한 이 후기를 읽는데, 오래 전의 마음이 되살아난다. 구비할 물품들을 준비하면서, 샴푸와 린스, 바디 샤워는 특히 공을 들였다. 향이 좋은 것들로, 그리고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회사의 것들로, 조금 더 친환경적인 것들로. 그리고 내가 사용하는 것들과 같은 것들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샤워는 소중하니까. 더불어 그 생각은 이곳을 시작할 때의 다른 것들도 건드렸다. 여기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

그것은 다분히 불확실한 미래였다. 달과 나는 이런 종류의 비지니스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므로. 다만 앞서 경험한 각국의 집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 그게 다였다. 그럼 그것을 이곳 서울에서 구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순수하고도 맑은 열망이 전부였다.

연애하던 때, 우리는 꼬박 한 달을 걸려 함께 여행을 했다. 나는 우리가 머물렀던 도시들과, 우리가 짐을 풀었던 집들, 그리고 호스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한다. 각기 다른 그곳들에서 몹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 경험은 우리를 또 다른 곳들로 이끌었다. 영감이라면 영감이랄까, 자기만의 방을 꾸리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마리의 집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홀로 일주일을 머물렀다. 렌트비가 비싼 파리였으므로, 혼자 머무를 수 있는 작은 공간이 필요했다. 마리의 집은 그렇게 머물기에 아주 적당했다. 센 강변 가까이 있는 것도 좋았다. 나는 유유히 산책을 하고, 아무데나 퍼질러 앉았다. 그때만 해도 유심 없는 여행이었기에, 가져간 몇 권을 책의 줄창 읽었다. 레스토랑에서, 강변에서, 광장의 까페에서. 집, 에 돌아오면 고요가 맴돌았다. 그 작은 부엌에서 햇반을 데우거나 바게트를 썰었다. 우물우물 무엇을 씹으며 가져간 가이드북을 훑었다. 싱크대 밑 드럼세탁기에서 꺼낸 빨래들은 집안 곳곳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네스프레소 커피를 내려마시고,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았다. 밤과 낮, 그리고 프란시스 하. 갑작스런 비가 내리면, 꼭대기 층인 그 집의 천장이 빗소리로 울렸다. 부엌창으론 맞은편 지붕에 앉은 비둘기가 보였다. 그 해에도 난 늘상 피로에 시달렸으므로, 도착한 첫날 퐁피두 앞에서 찍은 얼굴은 거무죽죽했다. 기억한다. 며칠이 흐르고 낯빛이 차차 피어나는 것도. 그곳에서의 시간이 내게 치유가 되어주었다는 것도.

마리는 모르겠으나, 자기만의 방엔 마리에 대한 오마주들이 있다. 나는 내가 겪은 시간들이 이곳에서도 흐르길 바란다. 북적이는 도심 속, 조용한 공간. 이제는 진부한 말이 되었으나, 여전히 내겐 영향력 있는 문장.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그래서 다녀간 이들이 조용히 내게 속삭일 때, 내 마음은 순수한 기쁨으로 차오른다.

지난 금요일에는 전주와 순천에서 온 커플이 도착했다. 집 앞 골목에서 만나, 함께 집에 도착해 간단한 브리핑을 하고, 서둘러 신발을 꿰어신었다. 때로는 호스트의 지나친 상냥함이 되려 방해가 될 수 있으니까. 뒤축을 누르며 급히 운동화를 신는데, 선한 인상의 남자분이 말을 건넨다. 여자친구가 작가님 좋아한다고. 그 말에 나는 황급히 놀란다. 이어 여자분께서도 말을 거든다. 예전 플리마켓 할 때도 가고 싶었는데, 멀어서 못 갔다고. 너무 편한 복장에 편한 얼굴인 나는 조금 쑥쓰러워진다. 언제 어디서나 작가님이란 호칭은 몸 둘 바 모르게 만든다. 무릎을 꿇고 제대로 구도를 잡는 남자친구분 덕에 나는 신발을 벗고 다시 마루에 오른다. 어느새 웃는 얼굴로 포즈를 취한다. 선물 받은 초콜릿 상자를 들고서. 웃음은 어색했을지라도, 마음은 더없이 따뜻했다. 정말로 그랬다.
마음 속에 어렴풋하네나마 정해둔 기일이 차차 임박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여러 종류의 일이다. 일이라면 일이고 사건이라면 사건일. 어쩌면 전화점일지 모를. 해가 바뀌면, 원서동에서 원고를 마무리해도 좋겠다고 달은 말했다. 새해가 기대되는 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다.

덧글

  • 2017/12/20 11:09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7/12/27 20:21 #

    저 댓글은 오래 전에 보았는데 이제야 다네요. 마음이 다 두근거려요. 정말.......
    무엇이 되었건 어디에 가시건 정말 축하드려요. 많이 떨리고 설레시겠어요.
    그리고 저도 정말 큰 도전을 하려고 해요. 그래서 마음이 많이 싱숭생숭하고 그랬어요.

    아 그리고 먼 곳 가시더라도 꼭 여기서 종종 뵈어요. 달토님 댓글 보면 참 좋아요.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셔요. 새해 복도 많이 많이 받으시고요. 떡국도 많이 잡수셔요!
    오늘 아침 떡국 먹었는데 또 생각나네요.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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