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꾸리는 마음 빛을먹고사라져버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계절이었다. 이것이 몇 번째 사춘기쯤 되려나. 연초에 찾은 병원에선 비타민 디 결핍이라 했다. 늦겨울 해가 질 무렵이면 나는 서쪽 창가에 기대 지는 햇살을 일부러 맞았다. 별 효용이 없었을까. 자주 울던 날들이었다.  

고민은 깊었는데 실행은 한순간이었다. 반나절만에 비행기표를 끊고 첫 번째 도시의 집과 두 번째 도시의 집을 정해버렸다. 첫 번째 도시에서 두 번째 도시로 넘어가는 비행기표도 예약했다. 세 번째 도시의 집들을 둘러보다 노트북을 닫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내게는 그런 마음과 자세가 절실했다. 될 대로 되라지의 뻔뻔함. 표를 끊었으니 어떻게든 가게 되지 않겠나의 자세로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 네 번째 도시, 그러니까 서울의 집에도 게스트가 도착했다.

창덕궁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나는 손을 흔들었다. 유주와 조이도 손을 흔들었다. 작년 가을 무렵 보고 두 번째로 만나는 얼굴들. 둘 다 머리가 짧아졌길래 손으로 가위질하는 시늉을 하니 맞다면서 웃는다. 우리는 힘을 합쳐 트렁크를 싣는다. 백일의 살림살이를 담은 짐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크다. 조이의 트렁크는 조수석에, 유주의 트렁크는 자동차 트렁크에 넣으려는데 아슬아슬하게 문이 닫히지 않는다. 이를 어쩌지 고민하다 용기를 낸다. 야심한 밤, 북촌의 거리는 고요하다. 나는 아주 조심하고 안전하게, 브이아이피를 모시는 마음으로 운전을 시작한다. 창덕궁 담벼락 길을 지날 때만 해도 우린 웃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었는데, 야트막한 오르막을 오르면서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급기야 마지막 언덕에선 유주가 다급히 나를 부른다. 자동차 트렁크 문이 활짝 열렸다고. 다행히 짐이 떨어지진 않았다. 서둘러 주차를 하고, 위태로운 짐을 받아내 린다. 그것들을 함께 이고 지고 나른다. 집에 도착했을 땐 셋 다 헉헉거리고 있다. 물은 한 잔씩 마시고서야 진정한 의미의 웰컴을 외칠 수 있었다. 웰컴 투 더 서울.

그 서울을 떠나려는 나는 체크리스트의 목록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환전한 돈은 반으로 나눠 담는다. 여름 옷가지들을 차곡차곡 개켜넣는다. 주문한 필름들도 선물할 책도 얌전히 제 자리를 찾는다. 소중한 식량들로 트렁크의 빈 공간을 채워넣는다. 뭔가 빠진 게 있다 싶어 늦은 밤 편의점으로 향한다. 호스트들에게 줄 선물로 요구르트맛 젤리와 자일리톨 캔디를 산다. 내 딴에는 그것들이 부담스럽지 않은 한국의 맛으로 느껴졌나 보다. 며칠 전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엉겁결에 받아든 일감을 가져가는 것이 못내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서 적잖은 환상이 피어나기도 했다. 디지털 노마드라는 순진한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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