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지갑 속 조그만 부적 빛을먹고사라져버린

인천-뮌헨-바르셀로나로 가는 여정. 좌석에 앉아 자일리톨 껌을 꺼냈다. 비닐을 벗기고 껌 하나를 꺼내려는데 종이 포장지의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매사 순조롭게 풀리게 되리라'. 껌종이에 쓰인 글귀치곤 엄중한 어조다. 문득 이 예언적 글귀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순리대로 순조롭게 별 탈 없이. 그런 여행이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구겨 버리는 대신 여권지갑에 소중히 끼워 넣는다. 조그만 부적이 생겼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하다 보니 뮌헨이다. 비행기에서 내리려는데 루프트 한자 어플에서 알림이 온다. 환승편인 바르셀로나 행 비행기가 취소되었다고. 그리고 이어 대체된 편명이 뜨는데 어쩐지 이상하다. 뮌헨에서 브뤼셀에 가란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를 타라고. 게다가 브뤼셀 행 비행기의 이륙은 얼마 남지 않았다. 당황한 마음으로 루프트 한자 안내 부스를 찾았으나, 바뀐 편의 티켓만 뽑아줄 뿐 위로의 말은 없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 비행기 탈 수 있겠냐고 물으니, 충분히 탈 수 있다며 심사 줄로 가라고 말한다.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줄을 선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걸음을 재촉한다. 이게 무슨 일인지. 매사 순조롭게 풀리기는커녕 내 안의 염세주의가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그렇게 브뤼셀에 당도하고야 만다. 맥주와 레모네이드를 앞에 두고 출발 현황을 살피는데, 바르셀로나 행 비행 편이 또 미뤄진다. 우리가 탈 비행기보다 앞서 출발하는 비행기도 그렇다. 슬슬 걱정이 밀려온다. 테러 같은 일이라도 일어났는지, 공항이 폐쇄라도 된 것인지. 불안한 마음에 찾아보니 현재 바르셀로나 상공에 번개가 엄청나게 치고 있단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걸까. 오고 가는 비행기들이 죄다 뜨지 못한다고. 호스트에게 말해둔 예상 도착 시간보다 훨씬 늦어질 것이 뻔해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브뤼셀에서 발이 묶여있는 상태고,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면 오후가 아닌 밤이 될 것 같다고. 곧 답장이 온다. 조카를 보러 독일에 간다던 엘리 역시 공항에서 몇 시간째 대기 중이라고. 대신 체크인을 도와줄 안드레아에게 우리 사정을 설명해 놓을테니 걱정 말고 잘 도착하길 바란다고 했다. 이제 비행기가 무사히 뜨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유난히 심한 터뷸런스를 뚫고 결국 늦은 밤 공항에 도착했다. 안드레아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늦은 밤 한산한 도로를 달린다. 점점이 뿌려놓은 불빛들 너머로 도시의 윤곽이 어렴풋하다. 왼편 창가로는 산 중턱에 선 국립미술관이 보인다. 종일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진다. 이상도 하다. 고향도 아닌데 고향에 온 기분. 택시는 엘리의 집 앞에 섰다. 마중 나온 안드레아와 우리는 어색한 인사를 나눈다. 집 곳곳의 안내를 들은 뒤, 나는 주섬주섬 트렁크를 열어젖힌다. 요구르트맛 젤리로 수줍은 마음을 전달한다. 고맙다며 손 흔들고 헤어진 안드레아는 잠시 후 다시 문을 두드렸다. 두고 간 것 같다던 핸드폰은 바지 뒷주머니에 꽂혀있었다. 두 유 미스 미? 어줍잖은 농담에 다같이 웃는다 

가방을 풀고 세면도구와 잠옷을 꺼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한결 홀가분한 기분이다. 집 구석구석을 살피며 엘리의 취향을 엿본다. 단촐하면서도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로 무사 도착을 자축한다. 앞으로 열흘하고 이틀, 바르셀로나에 집이 생겼다.



덧글

  • 2018/07/09 13:0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7/11 11:2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