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를 여는 날 어떤 동네

오후 다섯 시라는 오픈 시간이 적잖은 위로가 되어준다. 식탁 위 에이포 종이엔 어제의 할 일, 오늘의 할 일이 늘어서 있다. 옥상/음료/피자 같은 키워드들이다. 물론 키워드 안엔 세세한 공정들이 숨어있다. 완성된 한 컷을 위해 켜켜이 쓸고 닦는 호스트의 태도. 그와도 비슷하다. 어젯밤엔 식탁에 앉아 한가득 펜을 꺼내 들었다. 스케치북을 접고 접은 다음, 선을 따라 자른다. 경품 추첨을 위해 쓸 종이다. 원래 계획은 보물 찾기였다. 집안 구석구석 숫자를 적은 종이들을 숨겨놓을 참이었다. 액자 뒤, 화분받침 아래, 두툼한 책 사이. 그러나 파티를 하루 남기고 깨달았다. 그럼 집안 구석구석을 아주 꼼꼼하게 청소해야 한다는 것을, 그러기엔 시간이 조금 빠듯하다는 것을. 나는 색색의 펜으로 숫자들을 써내려 간다.
시간이 필요한 일, 예를 들면 장을 봐오는 것부터 시작해 맥주를 차갑게 만드는 것, 태양열로 충전해 빛을 내는 등을 미리 달아두는 것, 협찬받은 테이블과 의자를 실어오는 것. 그런 일들을 먼저 해두고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찬찬히.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는 일. 그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파티 날 아침 제일 먼저 한 것은, 거실에 가로로 놓인 식탁을 세로로 돌려 벽에 붙이는 것이었다. 책들을 벽에 기대어 세워놓고, 그 아래 어제의 종이들을 늘어놓는다. 알록달록. 보기에 어여쁘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나머지 준비들을 하기 시작한다. 로봇 청소기를 돌려놓고, 옥상의 테이블을 편다. 얇게 썬 사과와 오렌지 위로 와인을 붓는다. 색색의 접시와 잔들을 꺼내놓는다. 택배 박스에는 오늘의 선물들을 하나씩 담는다. 발표하는 순서를 적은 종이도 함께다. 열심히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 콧잔등에 송송 돋은 땀. 이제 세수도 좀 하고, 뭐라도 찍어발라야 할 시간이 온다.

처음 초인종이 울렸을 때, 적잖이 두근거렸다. 문이 열리자 환한 얼굴의 두 아가씨가 보인다. 한아름 팔에 껴안은 화병엔 작약이 한가득. 이른 새벽, 꽃시장에 들러 직접 산 꽃이라고 했다. 우리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담소를 나눈다. 아침나절 집을 나섰던 케이트도 돌아온다. 그리고 아주, 아주 많은 분들이 도착하기 시작한다. 나는 능숙한 호스트의 자세로, 현관문 다음으로 냉장고 문부터 열어젖힌다. 방금 만난 얼굴들에게 활기차게 건네는 인사다. 두 종류의 맥주, 그리고 샹그리아가 있습니다. 뭘로 하시겠습니까? 맥주병을 든 손님들은 즐거운 얼굴로 번호표를 고른다. 시와 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니는 샹그리아를 청하고, 번호표도 하나 고른다. 나는 나중에 슬몃 언니에게 다가가 말한다. 그때, 그 무더운 여름날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샹그리아 마셨잖아요. 하고.
달이 직접 포장해 가져온 피자는 더할 나위 없이 맛있고, 손수 만든 과카몰리는 부족함이 없다. 나는 맥주병을 들고 일층에서 이층, 이층에서 다시 옥상을 요란하게 오르락내리락한다. 해는 마주 보는 산자락에 걸렸다. 서른 명 넘는 인원이, 그리 복잡하지 않게 옥상에 모였다. 안심이 된다. 나는 짧은 인사를 하고서 언니를 무대 위, 아니 옥상 가운데로 모신다. 언니는 우리가 조금 더 모여앉길 원한다. 의자를 끌어당겨 언니를 중심으로 원 비슷한 모양을 만든다. 한 조각 빼낸 피자처럼 모인 우리들. 산 아래선 확성기 구호가 요란한데, 언니는 조용조용히 기타를 치기 시작한다. 노래의 소절 소절 사이로 끼어든 것은 근처까지 다가온 새소리. 언니의 얼굴엔 웃음이 번진다. 모여 앉은 우리의 얼굴도 그렇다.

이윽고 다가온 경품 추첨의 시간. 그런 집중력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번호를 호명되면 번쩍 드는 손. 그러면 그 주변에선 박수가 터져 나왔다. 경품 추첨을 한다니 이렇게 저렇게 기부해주신 선물들까지, 테이블 위는 풍성해진다. 숙박권을 마지막으로 모든 추첨이 끝나고,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해가 성큼 넘어간 시각. 내려앉는 어둠 사이로 전등이 반짝인다. 반짝, 반짝, 반짝. 어느 테이블에선 타로를, 어느 테이블에선 책에 관한 이야기를, 또 어느 테이블에선 결혼에 관한 이야기들을 한다.
책의 탄생을 축하해 주시러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시다니. 나의 마음은 맥주 몇 병에 쉬이 말랑해진다. 늦은 밤, 조명과 조명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공기에 분위기는 무르익는다. 반갑게 나누는 인사들. 축하들과 선물들.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온 것이 분명하다. 원고에 등장하는 분들, 오래토록 글을 살펴봐주신 분들, 책을 매만져주고 태어나게 도와주신 분들, 그리고 책을 매개로 이렇게 발걸음해주신 분들까지. 그 얼굴들을 실제로 마주하니 더없이 설렌다. 모두가 돌아가고 난 밤, 피곤을 매달고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다음날, 다다음날까지도 계속 그렇게. 나는 '아! 행복하다!'라고 자주 외쳤다.
구기동 집에서 연 파티 덕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서른 명 넘는 인원을 불편함 없이 잘 모실 수 있을까, 했던 우려는 상기된 표정들 사이로 지워졌다. 다음의 또 어떤 일들도 오늘의 기억 덕에 해낼 수 있겠지. 나는 야심찬 얼굴로 야외 풀장을 검색해 본다. 어쩌면 풀파티, 일지 모르겠다.

와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어린 감사를 전합니다. 그날의 분위기는 짧게나마 여기에 담아봤습니다. 저는 또 호스트답게, 비슷한 인사를 하게 되네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 다시 한번 뵙고 싶어요. 놀러오세요, 라고요. 

덧글

  • 2019/06/10 23:2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06/12 22:1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9/06/13 06:35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9/06/14 08:28 #

    그쵸그쵸 언덕! 모두다 그 말씀들을 하시는 그 언덕 ㅋㅋㅋ
    재미난 거 말씀 드릴까요 ㅎㅎ
    이번에 구기동 집에 이사오신 분들(그러니까 저희 나가고 새로 오신 분들)도 놀러오셨어요.
    뭔가 재미나지 않습니까. 그분들도 좀 놀라셨을 거예요.
    지금 사시는 집에 놀러오셨다는 분들이 좀 게셔서요.
    하하하 독일하니 생각납니다. 그때 늦게까지 술 마시고 수다 떨던 기억이요.
    처음 가셨을 때 이야기 해주신 것들도 생각나고요. 와.. 이제 마지막 학기라니, 여러모로 바쁘시겠어요.
    이렇게 짬내어 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응원합니다!

    지금 잠깐 닫아둔 상태라, 제게 메일 주시면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evena1222@gmail.com 입니다.
    서울 오실 때 여기 묵으신다면 또 엄청 재미나겠어요. ㅎㅎㅎ
    그런데 정말 그런 날이 올 것 같아요!
  • 2019/07/02 00:4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07/05 22:1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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