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느다란 실로 연결된 한 꾸러미의 이야기 어떤 동네

정독도서관과 미술관 사잇길, 작은 골목으로 숨어든다. 전에 지나다니며 어여쁘다 했던 곳이 오늘 갈 곳이다. 아담한 한옥에 자리한 갤러리. 입구에 자리한 방명록에 글을 남긴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유리 너머로 작은 마당이 보인다. 그 마당을 에워싼 네 개의 긴 복도에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잠시 작품들을 살피다 작가님을 만나 뵙는다.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는 얼굴. 작가님은 축하해주러 온 지인들에게 우릴 소개한다. 제가 요즘 이분들 댁에서 아주 잘 머물고 있어요, 라고. 우린 그렇게 만난 사이다.

한참도 전인 어느 날, 메시지가 날아왔다. 예약을 하며 게스트는 여행의 목적을 담은 짧은 소개글을 보내오기 마련이다. 날아온 메시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이번에 한국에서 전시를 열게 되었다고, 한 달의 일정 동안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 그 짧은 메시지에 앞뒤로 살이 붙기 시작한 건, 우리가 한 지붕 아래 살게 되면서부터다. 조그만 쪽지, 작은 초콜릿에서 시작해 두런두런 나누게 된 이야기들. 오계숙 작가님은 이십 대에 이민을 가셨다고 했다. 한참을 바쁘게 아이들 키우며 살다가 뒤늦게 학업을 이어가셨다고도. 그리고 어머니의 백수를 맞아, 한국에서도 전시를 열게 된 것이 몇 년 전이라고. 작년에도 같은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어 삼청동에서 머무르셨다고 했다. 올해도 다시 그 숙소를 찾으려 했는데, 그만 문을 닫고 말았다고. 그러다 우리 집의 제목을 보고 아! 여기다! 라는 생각이 드셨다고 했다. A Room of One's own. 그 말이 어찌나 감사하고 고맙던지.
작품은 미국에서 먼저 날아왔다. 작가님은 매일같이 갤러리에 나가 전시 준비를 하셨다. 오프닝 파티에 오면 좋겠다며, 초대장도 주신다. 작품 소개글을 읽다 보니 한국전쟁의 기억이란 문장이 선명하다. 먼저 물은 것은 아닌데,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흘러나오게 된 이야기다. 1941년생.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려보다 이내 화들짝 놀란다. 지금 내 앞의 작가님은 여든이 코앞인 호호 할머니가 아니라, 혼자서 커다란 캐리어 세 개와 함께 날아온 게스트니까. 맥북과 아이폰은 작가님에게 낯설고 생경한 물건이 아니다. 에어비앤비 예약 역시 그러하다. 내 마음엔 일종의 존경심이 깃들기 시작한다. 온화하고 따스한 말투로 집이 참 좋다고, 스튜디오 같아 작업하기도 좋다고 말씀하신 오후엔 색색의 실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다. 이층의 화분들은 윤이 나기 시작한다. 끝이 마른 잎사귀는 어느새 말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나보다 몇십 년은 더 식물을 돌봐왔을 손길이 거기 머문다. 주말 아침, 해도 쪼이고 바람도 쐬라며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에 화분들을 꺼내놓고 있자니, 내 방 화분도 가져올까요? 하며 꺼내 주신다. 하나씩 옮겨 놓고서 빛나는 잎사귀들에 함께 기뻐한다. 무럭무럭 자라거라, 그런 다정한 말이 귓가에 닿는다. 바빠 못 살피는 사이, 종종 나 대신 물도 주시는 모양이다. 라벤더는 키를 키우고, 몬스테라는 새잎을 틔웠다. 우리 집 게스트들이 식물들을 돌봐주는 것은 이미 역사와 전통이 되어간다. 뭔가를 만들고 키우고 잇고 기우는 사람들이다.

준비해 간 꽃다발을 드리고, 전시에 관한 작가의 말도 들었다. 작가님의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모든 바느질은 다 할머니에게 배웠어요. 그때는 시집가기 위한 좋은 덕목 중 하나가 바느질이었으니까요. 내가 아이들을 키우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그러다 막막해질 때가 있었어요. 내가 뭘 하면 좋을까.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그때 나는 그 옛날의 바느질을 떠올렸어요. 로 시작되는 이야기. 전쟁을 직접 체험한 이의 이야기는 내게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미아리 고개 너머로 탱크가 지나가고, 먼 하늘에서 포탄이 터지는 소리. 사람들이 죽고 또 죽는 장면들. 작가님은 그 시대를 이렇게 건너왔다. 시대뿐 아니라 태평양도. 가느다란 실로 연결한 한 꾸러미의 이야기를 안고서.

우리는 작은 내실에 모여 앉아, 갤러리 관장님이 차려놓은 식탁에 앉는다. 찐 감자와 열무김치, 자두와 참외. 허브를 띄운 자몽에이드까지. 보기에도 좋은 여름 식탁이다. 작년 가을의 페트라, 올해 초의 케이트, 이른 봄의 효정 씨. 그리고 늦봄의 데이빗. 초여름엔 다시 케이트. 오래 머물고 오래 이야기 나눈 게스트는 계절과 함께 기억된다. 유월과 칠월은 작가님으로 기억되겠지. 그렇게 달력이 넘어간다. 칠월, 칠월이 왔다.

덧글

  • 참홍삼파워 2019/07/06 01:52 # 답글

    첫번째 작품 느낌이 좋아요~~ 혹시 갤러리 어디쯤인지 알수있을까요? 성함을 검색해봐도 전시회를 어디서 하는지 알 방도가 없네요 ㅠ ㅠ
  • 한량 2019/07/06 09:11 #

    네! 갤러리 아트링크입니다. 안국동에 있어요. ^^
  • 2019/07/06 23:4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데이 2019/07/11 13:58 # 삭제 답글

    한량님 안녕하세요! 가을쯤 에어비앤비 예약하고 싶었는데 저장해둔 목록에서 자기만의 방이 사라져서요ㅠㅠ 혹시 쉬어가시는 기간인건지 아니면 링크 주소가 바뀐건지 궁금합니다!
  • 한량 2019/07/11 14:27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연락처 비밀글로 남겨주시면 제가 링크보내드릴게요^^
  • 2019/07/12 09:17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9/07/12 16:43 #

    문자 드렸습니다 ^^!
  • 2019/07/24 09:37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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