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치는 헤엄 빛을먹고사라져버린

책장에서 고심 끝에 고른 책은 '케빈에 대하여'였다. 힐끔 보던 달은 납량특집이냐 물었지만, 그럴 리가. 마침표 뒤에 붙는 말들을 숨기고, 나는 열어놓은 트렁크를 채우기 시작한다. 오직 하룻밤을 위한, 오직 나를 위한 물건들을 차곡차곡.

속도 제한 시속 백 킬로미터. 두들겨대는 드럼과 징징 울리는 기타 소리를 배경으로 마음껏 밟기 시작한다. 어디까지 올라가나 보자는 심정으로 계기판의 바늘이 백삼십을 넘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장하다, 모닝. 어쩌면 굶주렸는지 몰라. 도심권 속도 제한 오십은 소격동 앞에선 사십, 삼청로에선 삼십으로 줄어든다. 그 길을 수동 기어로 달리는 나.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보면, 클러치를 밟는 왼쪽 종아리가 뻐근해 왔다. 설상가상으로 전기 문제가 좀 있었다. 지난 겨울, 아니 지지난 겨울부터였나. 핸들 열선이 작동하지 않아, 겨울철 조그만 호사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쯤 해서 카센터에 들렀으면 좋았을 것을, 게으른 나는 곱은 손을 호호 불며 핸들을 잡곤 했다. 그러더니 몇 달 전부터는 에어백 경고등이 떴다. 이제 충돌을 하면 내 에어백은 팡 터지는 대신, 시시하게 팔랑거리다 쪼그라드는 것일까. 그다음은 클락션이었다. 아무리 쾅쾅 쳐대도 아무 소리를 내지 않는다. 이건 뭐 사람의 노화와 비슷하지 않은가. 나의 핸들은 오직 핸들의 본질, 좌우 회전밖에 남지 않았다. 클락션이 죽고 나니, 인내심이 길러지려나 했다. 무례하고 위험한 대상들을 향해 소리 지르는 대신 속으로 참을 인을 그려야 하니. 허나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인내심 대신 는 것은 욕이다. 혼자 말하고 혼자 듣는 욕, 때론 보일까 보이지 않을까 분노 반 우려 반을 담아 흔들어 대는 뻐큐. 운전할 때야말로 사람 본성이 나온대요. 같은 말을 애써 무시하며 사대문 안을 뱅뱅 돌던 날들. 그러나 오늘은 달려도 좋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은 없고, 희부연 안개 덕에 눈 앞은 흡사 지평선처럼 보인다. 클락션을 누를 일도, 들을 일도 없이 달리는 길. 그러다 몇 번을 깜짝깜짝 놀랐다. 거짓말 조금 보태, 가로등 위로 비행기가 날고 있어서. 차창을 가득 메우는 비행기의 옆구리. 이 동네는 다 그렇다는 듯, 갈매기 역시 아주 낮게 도로를 가로질렀다. 빨간 구두 뒤축을 부딪히지 않고서도, 떠나기 가장 좋은 곳. 인천의 서쪽 끝에 왔다.
신기한 일이다. 집에서 약 칠십 킬로미터, 한 시간 십여분을 달려왔을 뿐인데 기분과 마음이 달라진다. 거대한 건물 안엔 적당함이 가득하다. 적당한 조도와 온도, 적당한 음량의 음악. 이처럼 안전한 모험이 또 있으랴. 계산된 각도로 열린 커튼 너머론 바다가 보였다. 아까보다 작아진 비행기가 몸을 낮추는 것이 보였다. 나는 하루치의 짐을 풀어헤친다. 걸어둘 옷은 걸어두고, 미리 사 온 맥주는 서둘러 냉장고에 넣는다. 아니, 넣기 전 하나는 먼저 따고야 만다. 그 덕인지 게스트이자 호스트인 눈빛은 순하게 누그러진다. 호텔의 사물들은 모두 반듯반듯하다. 생활감 없는 공간. 익명성을 전제로 나 홀로 숨기 좋은 곳. 흠, 좋군. 말끔하게 정돈된 침대를 흐트러뜨리는 일은 여전히 아까워, 나는 의자에 앉아 맥주를 홀짝인다.
오후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가볍게 짐을 꾸려 나선 길, 나는 썬베드에 누워 가져온 책을 꺼내든다. 예전에 접어둔 페이지들이 보인다. 읽다 멈춰 접어둔 게 아니다. 잊을 수 없는 문장들이 쓰인 페이지. 귀퉁이의 작은 세모들. 접은 페이지는 자꾸만 등장한다. 읽다가 고개를 들어야 할 땐, 눈 앞의 수영장으로 향한다. 왕복으로 헤엄을 치고, 다시금 돌아와 엎드린 책을 든다. 그 사이 몸은 바삭바삭 잘도 구워진다. 노력하지 않아도 거저 얻는 몇 안 되는, 아니 어쩌면 유일한 일. 태닝. 이 한 철 저축해 겨울을 나려는 듯 비타민 디를 열심히 만들어댄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사랑하는 이와 함께 온 이들. 웃음과 수다들이 수면 위에 떠다닌다. 비행기는 여전히 저 멀리, 그러나 아주 멀지는 않게 착륙 중이다. 케빈은 엄마 품에 안기길 거부하기 시작했다.

뿌듯하게도 제법 기다란 풀을 몇 번 왕복했다. 물안경 없이, 수모 없이, 우아한 개헤엄으로. 그러다 숨이 차면 풀의 가장자리에 양손을 얹고, 부력에 의지해 발을 살랑거려 본다. 지는 해는 그림자를 늘어뜨린다. 누그러진 볕은 더 이상 따갑지가 않다. 내려올 때와 다른 톤이 되어 나선다. 젖은 머리를 툴툴 털면서.
짐을 꾸릴 때, 제일 먼저 챙긴 것은 노트북이었다. 가져가서 일 좀 해야지. 얼마 전 완성해 보낸 원고가 하나, 이틀 앞으로 마감인 원고가 하나, 열흘 앞이 마감인 원고가 하나. 셋의 성격은 조금씩 다르다. 질감도, 양도, 색깔도. 그 셋은 종종 사이좋게 미뤄지지만, 무엇을 써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리에 달라붙어 있다. 아마도 잠든 순간에도, 눈 비비며 세수할 때에도, 언제나처럼 맥주를 홀짝일 때도. 나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가지를 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글을 쓰기 위해 스스로를 감옥에 넣었다는 사람이 떠오른다. 아바나에선 헤밍웨이가 오래 머물렀다는 호텔에 들렀다. 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앉아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구석구석 시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로비. 벽에 기대선 이들. 나는 여기 521호의 문을 닫고, 은근히 아늑한 책상 앞에 앉았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핀 조명은 오직 책상만을 비추고, 사방은 고요하다. 가끔 복도 너머로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지만, 새벽녘이 되자 그도 사라진다. 바다 위로 떠오른 달은 선명하게 붉었다. 보름이 가까우려나. 둥근 배를 내민 달이 하늘 높이 떴다. 

홀로 떠나온 여행, 그건 언제나 나를 용감하게 만든다. 무거운 캐리어를 이고 지고, 주소만 아는 곳을 찾아 열심히 발품을 팔고. 낯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일. 제 삼의 언어, 제 사의 언어로 손짓 발짓을 하다 웃음을 터뜨리는 일. 첨벙 바다에 뛰어들어 몸을 뒤집으면, 썬글라스 너머로 태양이 또렷했다. 부력만큼의 힘이 나를 서서히 밀어낸다. 나는 그덕에 한 발,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뛰어들 수 있었다. 어떤 형태의 헤엄이라도 좋아, 나는 계속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고 싶다. 물안경도 없이, 수모도 없이.   



덧글

  • 별보기 2019/08/15 23:30 # 삭제 답글

    한량님의 우아한 글은 읽고나면 항상 마음이 따뜻해지고 삶의 방식과 인생을 바라보는 한량님만의 시선이 부러워진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읽고갑니다 :)
  • 한량 2019/08/16 16:17 #

    아이고 과찬이십니다. ^^ 여름 잘 보내고 계신지요. 아주 덥다가도 밤엔 조금 선선한 느낌이 들어요. 풀벌레 소리 들으면, 가을이 금세 다가오겠구나 싶어요. 올해도 얼마 안 남았네, 이런 생각도 들고요.
    이렇게 댓글 남겨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종종 들러주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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