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없는 여행기 쓰기


여행 중, 카메라 두 대와 삼각대를 이고 다녔다.
강렬한 햇살, 송글송글 맺히는 땀, 바닷바람의 냄새, 물집 잡힌 발의 쓰라림, 낯선 음식의 맛과 향.
이런 것을 도저히 잡아내지 못할 걸 알면서도 나는 연신 셔터를 눌렀다.
사진은 객관적으로 내가 다닌 발자취를 기록할 뿐이지만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다보니
그 때의 느낌들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신기하다. 

하지만 난 그런 생각을 했다.
사진 없는 여행기가 가능할까.
시각적인 증거없이 언어로 그만큼의 감동을 묘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어려운 일이겠다 싶지만, 그것은 나의 공력이 부족해서일지 모른다.
그만큼 요즘의 난 말과 글의 힘에 절실하게 매달린다.

낯선 언어들의 물결 속에 둥둥 떠다니면서
나는 각각의 말들이 제각기 다른 억양을 가지고 있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말들이 가지고 있는 유구한 역사를 떠올리며 가슴이 콩콩 뛰었다.
지금도 그 나라들의 아기들은 '엄마' 같은 단어를 자기들만의 유난한 억양으로 배우고 있겠지 하고.
고작해야 3박 4일. 우스울 정도로 짧은 일정이지만
나는 말에 대해 걱정했었다. 잘 모르는 언어로 어떻게 의사소통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말이 그리워지면 어쩌나 하고.
입을 달싹달싹하고 싶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읽을 수 있는 활자들이 그리워지면 어쩌나 하고.
공항 서점에 쪼그리고 앉아 이리저리 시집을 뒤적였었다.
얇고 가벼운 놈으로 하나 가져가 읽어야하는 것 아닐까.
여행 내내 한국말은 딱 한 마디 했다.
밤늦게 세븐 일레븐에서 오늘의 맥주를 고르고 있던 때,
옆에 온 커플이 이야기를 나눈다.
'이게 무슨 말이야?' '잘 모르겠네..'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말을 건넸다.
 
'여기 노란 가격표 붙은 맥주들은 2개 사면 이 가격으로 할인해주는거예요.'
 
혼자 다니는 것은 꽤 괜찮았다.
메뉴를 고르거나, 일정을 바꾸거나 하는 여러가지의 선택 앞에서
누군가를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편했다.
반대로 '배려' 받음에 대한 마음의 빚이 없어서도 좋았다.
인생을 이렇게 여행처럼 홀가분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미 지나가버려 바꿀 수 없는 선택에 대해,
몹쓸 후회와 자책을 동반하는 일들에 대해,
그 말이 무슨 뜻이었을까? 혹시 이런 뜻이었을까? 같은 흘러가버린 말들에 대해,
내 힘으로 할 수 없었음에도 여지껏 가능성을 점치며 나를 괴롭히는 미련들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
 
어깨에 힘 빼고
마음의 조급함 없이
연연해하지 않고 싶다.
놓을 것은 놓고 잡을 것은 잡고,
그 선택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믿게끔 좀 더 단단해져야겠다고.
여행에서 얻은 것은 이 것 하나로도 충분하다. (2009.07.29)

 


이글루스 가든 - 매일 매일 한 편의 글쓰기.

핑백

  • 한량 : 2009 Sum Hongkong & Macao (1) 2010-06-06 16:14:17 #

    ... 월에 걸렸으니까 올해는 끝났어.그리고 여기서 취소하면 지금 수수료가 얼만데. 걱정마셔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꺅!이래도 즐거웠다. 응. 진짜로.+ 다녀와 썼던 짤막한 여행기.++ 이 포스팅은 디카 버전으로 별다른 맥락없는 순행적 구성. 아..저기에 낀 김치와 조미김은 뭐지. 하면서 싹싹 비웠던 나의 쉬운 입맛에 감사.공항에서 빠져 ... more

덧글

  • 2010/06/06 15:3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한량 2010/06/06 16:30 #

    와! 그쵸그쵸? 그런 생각 하시는구나!
    단편집 좋아보여요. 가볍고 부담없는 녀석으로 ㅎㅎ
    여행기는 슬그머니 포스팅했어요.
    정보 중심의 여행기 절대 아니고 그냥 대강대강 기록 자체에 의의를.
    무려 1년 전 이야기인데 쓰다보니 그때 생각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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